박권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책을 열자마자 제일 좋아하는 책인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문구가 나와서 "42"를 속으로 외치며 읽기 시작했다.
작년 11월쯤에 듄을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적었었는데 이 책에서도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이야기 타래 하나와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협력하기 위해 다정해진다는 이야기 타래가 나는 눈에 들어왔다. 클럽장님은 아무래도 전자를 염두에 두고 추천해주신 것 같았는데 나는 요즘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생각하고 있다보니 자꾸 머리 한쪽이 후자로 가고 있어서 일단 두 가지 모두를 적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양자역학은 미시적인 세계의 물리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측정되기 전까지 확율로 존재하다가 측정하는 순간 그 시간에 오롯히 하나가 남고 다른 확율들을 사라지는 그 시간의 일관된 방향성을 중심으로 모든 물리법칙을 아우르는 최후의 1가지 이론을 찾아가고 있는 학문이자 현재 미시적인 제어를 통해서 전자/전기적인 엔지니어링이나 바이오쪽의 성과들에서 발생되는 문제 또한 양자역학을 통해서 그런 문제가 왜 발생되는지 밝혀지고 있다,
이처럼 양자역학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리적인 토대이지만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태도, 그리고 방식을 개선하고 더 변화하는데에는 철학과 과학이 그 생각하는 방식의 토대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인지
어느샌가 같이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나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결정하기 전까지 각각의 사건은 예언의 형태로 확율적으로 존재하며, 인간이 선택하고 실행하는 순간에 그 시간에 그 자유의지가 오롯이 남아 다른 확율(정보)를 리셋되거나 그 확율(정보)의 여파로 지속적으로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는 양자역학에서의 전자가 움직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미시적인 세계이지만 시간이라는 축 속에서는 거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다정함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여기에서 논지를 시작할 때 처럼 '왜 다정함인가'에서 '어떻게 다정함인가'라는 질문으로 변경해서 생각해보면
'필멸할 지라도 우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통해 사람이 될 수도 흑연이 될 수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었던 자기복제가 가능한 유기생체기계는 필멸하기에 특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져 인연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내는 것들.
그것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는 이기기위해서는 자비로운 팃포캣 전략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까지.
그리고 인간을 변하는 존재이며 변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시간을 쓰기에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말까지
모든 말들이 다정했고,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최근에 읽은 [다정함의 과학]이나 [다정을 지키는 다정]이라는 에세이가 생각났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 호혜하며 잘 살기를 바라고 도움을 요청하면 할 수 있는 한도에서 도움을 주는 그런 관계들을 쌓아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런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