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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dahlia Jun 03. 2020

피치 터널에 대한 이해

터널 이론, 얼마나 유용한가 

최근 야구계에서 각광받는 이론이라면, 단연 '터널 이론'을 꼽을 수 있습니다. 각종 방송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해설위원들 또한 이 '피치 터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터널 이론'에 대하여 (쉽지는 않겠지만) 쉽게 써내려 가 보려고 합니다. 


1. 터널 이론은 무엇인가


- 야구에 터널? 무슨소리야 

차나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긴 터널을 마주하게 됩니다. 터널이 끝날 때 까지는 그 끝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터널 끝에서 길이 갈라진다고 해 보죠. 설사 터널 끝에서는 길이 갈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터널을 통과하기 전 까지는 이 길이 어떻게 갈라질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뭐 이런 느낌.. 

즉, 야구의 '터널 이론'이라는 것은 터널 자체 보다는 터널을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공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기본적으로 투수의 공 궤적 사이에 '터널'이라 불릴 만한 것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요) 


- 궤적 사이에 '터널'이 존재 한다니요? 

이것을 야구에 적용해 보죠. 연속된 2회의 투구에서, 1구와 2구가 최대한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타자에게 날아간다면, 타자 입장에서는 2구의 위치를 판단하기가 어려워 지겠죠. 야구에서 말하는 '터널 효과'는 이것입니다. 

연속된 투구에서, '최대한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갈수록 타자가 속기 쉽다'는 가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래 그림을 한번 보죠.

피치터널에 대한 설명도(출처 : BaseballProspectus)

투수 판에서 홈플레이트까지는 60.6피트, 18.44미터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터널'이라고 부르는 구간은 투수가 공을 던지는 지점(릴리스 포인트)에서 (통상적으로)홈플레이트 앞 23.8피트가 되는 지점입니다. 즉, 릴리스 포인트부터 홈플레이트 앞 23.8피트가 되는 지점 까지 약 36.8피트의 거리에서는 연속된 투구가 거의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 '터널 이론'의 시작점입니다. 그리고 이 거리를 '터널'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위 그림에 나온 '터널 포인트'는 사실상 터널이 종료 지점이 되는 것이지요. 


- 왜 23.8 피트 지점인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부터 짚고 가 봅시다. 통상 90마일(144KMH)의 공이 포수의 미트에 꽂히기 까지는 약 0.4초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 중에서, 타자가 공을 파악하는 시간이 0.1초, 스윙을 하는 시간이 0.15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시간은? 네, 0.15초 정도죠. 이 0.15초는 무슨 시간일까요? 자 아래 수식을 보시죠.(참고 문헌 : 사이언스온)

[공이 도달하는 시간] = [최초 투구 인식] + [?????] + [스윙 동작]

네, 결국 ?????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0.15초라는 시간입니다. 투구 인식과 스윙 동작 사이에 이뤄지는 행동. 바로 '스윙 여부를 판단하는 시간'입니다.  구속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0.1~0.2초 사이의 시간 안에 이 공에 스윙을 할지 아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0.4초 중에서 0.25~0.3초 이내에 공을 칠 것인지 판단해야 하고, 나머지 시간이 바로 스윙에 사용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23.8피트 지점 언저리에서는 타자가 스윙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즉 터널 포인트라는 것은 '스윙 여부를 판단하게 될 마지노선 지점'에 가깝습니다. 


- 완벽한 볼배합을 찾아 떠나는 여행

  네, 터널 이론은 결국 '터널 포인트까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공이라면 헛스윙을 유발하기 쉬울 것이다'라는 가설에서 시작하는 일종의 피치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구계에 떠도는 전설같은 그것. '완벽한 볼배합'을 찾아가 보려는 이들의 모험이 바로 '피치 터널'입니다. 



2. 피치 터널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 피치 터널 vs 라이징 패스트볼

  일단 하나의 그림을 본 후에,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는 것이 이해에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움짤을 보시죠.

맷 하비 투구 움짤

위 그림에서 패스트볼, 슬라이더 직구가 거의 비슷한 궤적을 그리다가 갑자기 흩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움짤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습니다. https://blogs.fangraphs.com/wp-content/uploads/2013/05/Harvey_alltrail.gif << 이 움짤을 보시면 될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네, 거기 까지를 우리는 '터널'이라고 부릅니다. 초구에 패스트볼을 넣고, 두번째 슬라이더를 던진다고 해 보죠. 타자는 '아 이거 바로 전에 던진 직구다!' 하고 스윙을 했는데, 알고보니 슬라이더였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높은 확률로 헛스윙을 하게 되겠죠. 하지만 저 위의 커브볼을 보세요. 혼자 동떨어진 궤적을 그리며 날아갑니다. 이럴 경우 '피치 터널'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타자로 하여금 '이 공은 니가 아까 봤던 그공이야'라고 속이고자 하는 것이 목표인데, 커브볼은 출발부터 이미 속임수가 통하지를 않는 것이지요. 

타자의 인지 능력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피치 터널과 라이징 패스트볼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라이징 패스트볼은 '타자의 생각보다 공이 덜 떨어지는' 현상이며, 피치 터널을 통한 볼배합은 '타자의 예상대로 공을 던지는 척'하는 행위입니다. 차이점은 간단합니다. 라이징 패스트볼을 만들기 위해서는 패스트볼 하나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하지만 피치 터널을 이용하여 볼배합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 2가지 무기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물론 라이징 패스트볼 같은 구위를 가진 투수가 피치터널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아주 위력적이겠죠) 


- 터널이 길면 길수록 좋다?

  터널 이론을 대충 이해한다면, 아마도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터널을 최대한 길게 만들고, 마지막에 갑자기 공이 변하면 최고겠네?"


터널 이론의 기본 가정을 다시한번 떠올려 봅시다. 

'타자가 스윙할 시점에는 공이 타자의 생각과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터널 포인트에서 타자가 스윙하는 지점까지, (타자가 예상한 궤적에 비해) 공의 궤적이 충분히 변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터널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궤적이 변할 시간이 짧아지지요. 그 말인 즉, 터널이 길어질 수록 타자의 예상지점에 공이 도착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뜻이 됩니다! 

결론은, 터널 길이가 길어진다고 무작정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투수의 구질과 로케이션, 상대 타자의 성향 등등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 피치 터널은 이 하나를 가지고 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입니다. 


- 피치 디자인의 과정 속에 피치 터널이 있을 뿐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피치 터널은 피치 디자인의 일부입니다. 피치 터널 하나를 가지고 투수의 활약을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좋은 투수, 좋은 볼배합은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엮여있고, 매일 매일 상황이 변합니다. 완벽한 줄 알았던 볼 배합이 실전에서는 쓸모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동그란 듯 동그랗지 않은 공을 쓰는 야구입니다. 


- 최적의 터널 길이를 찾아가는 과정 

  네, 아마도 이런 주제가 가장 매력이 있을 겁니다. 어느 지점에서 공이 변화하면 스윙확률이 가장 높을까? 

2019년 Saberseminar에서 제가 이 주제를 가지고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너무나도 주제넘은 연구주제를 가지고 도전했었다는 생각....-_-

아래는 해당 발표에서 제가 대표적 투구 조합에 대한 터널 길이별 헛스윙 비율을 계산했던 자료입니다. 2줄이 있는데, 첫줄은 1구가 포심, 두번째 줄은 1구가 투심인 경우의 볼배합입니다. 첫번째 열부터 체인지업-커브-커터-포심-스플리터-투심-너클볼-싱커-슬라이더 순서입니다.(예: 1행 1열의 조합은 1구 포심-2구 체인지업을 던졌을 경우의 터널 길이별 헛스윙률)

투구조합별 터널 길이에 따른 헛스윙률(출처 : <Pitch Design : Effecive Tunnel Distance>, SS19 송민구)

* 이 자료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설명은 원래 이번 2월 야구학회에서 다룰 예정이었는데(미국에서 영어로 하긴 했는데 발표자도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에 없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현재 무기한 연기된 상태입니다.(=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저때 약 3년 반 동안의 연속 투구 조합을 모두 조사했었는데, 대략 샘플이 수십만개쯤 되다 보니 계산하는데 한세월을 보냈던 기억이 나네요.(계산에 사용했던 모듈/라이브러리들이 병렬처리를 지원하지 않음;;;) 


대충 이 연구의 결론을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통상 '직구'라 불리는 공을 셋업피치로 던져놓고 헛스윙을 유도하고자 한다면, 대략 투구판에서 26~33피트에서 변화점이 생기게끔 할 수 있는 세컨드 피치를 던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글 가장 위에서 보여드린 터널 포인트는 23.8피트 정도인데, 제 연구 상으론 터널 포인트는 대략 홈플레이트 앞 기준 26피트 정도가 마지노선이 될 경우에 가장 효율적이다 라는 것이었지요.

이 연구는 아주아주 불완전한 것이므로 - 뭐 그럴리도 없지만 - 어디가서 이걸로 떠들고 다니시면 안됩니다. 

저 연구를 진행했던 당시, 제가 좀더 보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터널 포인트를 '길이'로 생각하지 말고 '반응 시간의 단위'로 환산해보면 어떨까 

터널 포인트가 꼭 한개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기타 타자의 능력치에 대한 고려


- 아직은 시기상조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직 터널 이론이란 것은 완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조심히 다뤄야 합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아직은 '가설'에 불과한 녀석입니다. 실전에 응용하고자 한다면 좀더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3. 피치 터널의 전제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피치 터널'을 사용하고자 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피치 터널'을 위한 전제 조건 몇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 투수의 제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아주아주 당연한 말입니다. 피치 터널은 기본적으로 목표가 되는 로케이션을 정한 후에 역으로 투구를 조합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표한 지점에 공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에게 '피치 디자이닝'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미적분을 배우고 싶으면 적어도 인수분해는 다지고 와야한다는 것이죠. 


- 베이스가 될 주무기가 확실해야 한다 

  두번째, 제1구종이 확실해야 합니다. 베이스를 잘 깔아놔야, 속임수가 잘 먹힙니다. 극단적으로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완벽하게 피치디자인을 진행하여, 속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볼배합을 준비해 갔습니다. 투수도 완벽하게 던졌어요. 그런데 타자가 안속습니다. 그럼 답이 없어요.

이렇게 되는겁니다

항상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메뉴가 없다면, 계획이 틀어졌을 때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떡볶이 집에 갔는데 떡볶이가 맛이 없어요. 그러면 장사 되겠어요? 


- 노림수 타입의 타자가 아닌 경우에 효과가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어쨋든 하나만 노리고 오는 타입은 피치 디자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노림수형 타자는 타석에 들어오기 전부터 하나만 노리고 들어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노린게 들어오면 휘두릅니다. 애초에 우리의 가정을 벗어난 존재란 이야깁니다. 



오늘은 피치 터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제가 했던 연구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드릴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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