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뇌 속에 숨겨진 비밀
지금은 잊혀진 투수지만, 2000년대 초반 시카고 컵스에는 에이스급 투수가 3명이나 있었다. 카를로스 잠브라노, 그리고 20K 기록으로 유명한 케리우드. 마지막으로 마크 프라이어. 마크 프라이어는 당시 기준으로 '가장 아름다운 투구폼을 가진' 촉망받는 투수였으며, 기대만큼이나 빅리그 데뷔도 빨랐다. 2001년 드래프티가 2002년 바로 데뷔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완성도 있는 투수인지 알 수 있다.
마크 프라이어는 - (패슬커체 모든 구종이 완성형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적어도 필자의 기억속에 - 150~155km의 라이징 패스트볼이 정말 멋진 투수였다. 그의 투구를 보면 팬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의 투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크 프라이어의 라이징 패스트볼은 방송 중계 화면으로만 봐도 분명 위력적이었지만, 실제 그가 상대한 타자들에게도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했을 거라 짐작한다. 이건 그의 데뷔 4년간 9이닝당 삼진율(10+)이 증명해 준다.
분명 '라이징' 패스트볼 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해한다. 필자도 그 단어를 싫어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녀석의 실체는 '하이 패스트볼'이 맞다. 타자의 눈높이에 가깝게 던지면서 헛스윙이나 빗맞은 뜬공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라이징 패스트볼'과 가장 가까운 느낌을 주는 구질이 아마도 '업슛'일 것이다.
사실 김병현이 던진 '업슛'이라는 공은 패스트볼이 아니다. 위 그림에서 보이듯 김병현의 업슛은 마지막에 타자의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패스트볼 계열의 공들은 대부분 릴리즈 직전 손목을 몸쪽으로 비틀면서 뿌리게 되므로(pronation, 또는 내전이라고 한다) 역회전이 걸려 이러한 glove-side의 움직임을 가지지 못한다. 즉 김병현의 업슛은 슬라이더 내지 커브라는 말. (참고 : 패스트볼은 대체로 공을 던진 쪽 팔로 휘어들어가는 움직임을 가지고, 이를 arm-side 무브먼트라 부른다.)
그러니까, 왜 이걸 라이징 패스트볼이라 부르는 건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던지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과학적으로 볼 때, 김병현 같은 잠수함/사이드암 투수가 높은 곳을 겨냥하고 던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공은 릴리즈 포인트보다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라이징 패스트볼이란 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수들은 다들 '공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회전수, 궤적 같은걸 실제로 측정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TV 중계화면으로도 왠지 그래 보이니까, 다들 믿었다. 하지만 트래킹 장비가 고도화 되면서 더이상 공이 떠오른다고 해봐야 믿어주지 않는다. 그럼 선수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헛스윙하고 들어와서 쪽팔리니 둘러댄 것일 뿐인걸까?
여기서 '라이징 패스트볼'의 환상이 시작된다.
'공이 떠오른다'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를 위해 물리학자이며 신경과학자이기도 한 Jason Sherwin에게 의견을 구했다.(Jason은 현재 선구안 훈련 시스템인 uHit을 만든 deCervo의 CEO로 활동하고 있다.) Jason은 물리학과 신경과학 두 가지 관점의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의견을 주었다.
물리학적 관점
포심 패스트볼이 타자의 예상보다 빠른 회전량을 가질 때, 공은 중력에 반하는 방향으로 떠오르는 힘을 받게 됩니다. (이를 '마그누스 힘'이라 부릅니다.) 공이 더욱 빠르게 회전할수록, 이 마그누스 힘은 강해집니다. 두 개의 포심 패스트볼을 가정- 속도와 릴리스 각도는 동일 -해 봅시다. 이 경우 2000RPM의 회전을 가진 공(1) 보다는, 3000RPM의 회전을 가진 공(2)의 낙폭이 더 작을 것입니다. 1000RPM만큼의 마그누스 힘이 더 생겼기 때문이지요. (*주 : 여기서 회전량이라 함은 백스핀만을 가정한다. 아래에 Jason의 원문을 첨부함)
The physics explanation: When the four-seam fastball rotates faster than expected by the hitter, it will generate an upward force (called "Magnus force") that counteracts the downward force of gravity. The faster the ball spins in the air, the greater the upward force is. So if two four-seam fastballs are released at the same speed and launch angle, and one (1) has 2000 RPM and the other (2) has 3000 RPM, then "2" will not drop as much as "1".
이해를 돕기 위해, 마그누스 힘에 대한 설명이 잘 그려진 그림을 가져왔다.
신경과학적 관점
타자의 입장에서, 포심 패스트볼이 날라올 때 "H"라는 높이로 공이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타자의 뇌에서도 공이 홈 플레이트를 지나는 시점에서 "H"의 높이로 공이 들어올거라 예상하지요. 하지만 백스핀량이 많아질 수록, 마그누스 힘에 의해 실제 공은 "X"만큼 더 높은 위치에서 홈 플레이트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X"가 배트의 지름보다 커지는 순간, 타자는 '공이 떠올라서' 헛스윙을 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아래에 Jason의 원문을 첨부함)
The neuroscience explanation: For the two four-seam fastballs described, the hitter will be expecting the ball at one height ("H"). And his brain will predict a height of "H" when the ball crossed the swing zone. But because of the faster spin rate, the ball will cross at "H+X". When "X" is greater than the diameter of the bat, the hitter has the perception that the ball "rose" over his bat.
결론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Jason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이러한 상황들 때문에, 타자들은 공이 떠오른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타자들의 주장을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풀면 위와 같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투-타의 대결을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단지 (1)번 공보다 (2)번 공이 중력에 의한 영향을 덜 받은 것 뿐이라는 사실만을 보게 됩니다.
Of course, the hitters, as you know, insist that the ball rises. And that is their perception of what's happening. But the observer watching this from the side would only observe the ball not falling as much due to gravity in situation (2), when compared to situation (1).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야구 선수의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선수의 관점에서 다시 관찰해 본다면, '공이 떠오른다'는 느낌을 받을 만한 조건이 충분히 갖춰진 셈이기도 하다.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해 포항공대 정우성 교수님께 의견을 부탁드렸을 때, 아래와 같은 답을 주셨다.
흔히 처음으로 타석에서 커브볼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공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며 뒷걸음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투수의 커브볼은 정확히 포수 미트를 향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스스로의 예상이나 잣대를 기준으로 하듯, 타자도 마찬가지이다.라이징 패스트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밑에서 위로 던지면 공은 아주 높이 솟구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라이징 패스트볼은 이런 공은 아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듯 공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만 예상보다 덜 떨어지는 탓에 마치 솟구쳐 올라오듯 느껴질 뿐이다.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회전을 준다는 등의 극단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이론적으로는 정말 떠오르는 라이징 패스트볼이 존재할 수도 있다.
즉, '이론적으로는 라이징 패스트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물리학적 관점에서의 라이징 패스트볼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지 한번 조사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구글신의 도움으로 몇년 전 미국에서 이러한 궁금증을 물리학적으로 풀어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David Kagan은 Alan Nathan교수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라이징 패스트볼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래 그래프와 같다.
현재 가장 빠른 공이 105마일 정도라고 할 때, 3000RPM 이상의 백스핀을 가진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인류가 나타난다면 진짜로 '중력을 이겨낸' 라이징 패스트볼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MLB기준 많은 투수들의 포심 패스트볼 회전수가 2400RPM 미만이며, 여기서 백스핀만을 따로 추려낼 경우 효율이 아무리 좋아도 90%이상이 되기 힘들기 때문에, 라이징 패스트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110마일(176km/h)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나타난다면, 백스핀 량이 2000RPM정도로도 라이징 패스트볼이 성립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굉장히 낮을 것 같다.
이론상의 가능한 수치가 실제로 나타날 가능성이 없으므로, 허구에 가깝다는 말.
그렇다. 라이징 패스트볼은 선수가 보기엔 '있고', 과학적으로 보자면 '없는 것에 가깝'다. 꿈을 꾸는 것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자유다. 마지막은 이에 대한 정우성 교수님의 코멘트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상상하는 것은 인류가 가진 특권이니, 솟구쳐 오르는 공을 꿈꾸어도 된다.
하지만 과학이 불가능하다는 공을, 실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다고 하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 글 쓰는 내내 친절하게 의견 주시고 도와 주신 Jason, 정우성 교수님 외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