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CEO들

위기 속의 CEO

by 랜덤초이

한때 회사의 경영상황이 아주 안 좋을 때가 있었다.


회사 설립 후 수년간 초기 투자가 집중된 상태에서 매출 증가를 위한 고객 확보가 늦어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어 해마다 대규모 적자가 누적되는 어려운 여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미래 성장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던 새로운 사업영역에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던 사업권 확보에 실패하면서, 시장에서는 회사의 수익성과 미래 비전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불안한 시각이 커져가고 있었다.


외부의 불안한 시각이 점점 커져가는 것과 함께 내부 직원들 역시 동요하고 있었다.

한두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사업이 될 거라던 회사가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자, 회사가 구조조정을 할 거다. 다른 회사에 지분이 팔릴 거다라는 둥의 불안한 소문이 급격히 확산되었고 직원들 중에 이직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사람들도 슬슬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회사의 전략개발실에 근무하던 나로서는 그런 안팎의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덩달아 걱정되는 마음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CEO는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임원들에게 비상경영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한 워크숍을 지시하였다.


핵심 임원들이 날을 잡아 하루 종일 회사가 아닌 모처의 호텔 세미나룸에 모여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지금의 경영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실행방안을 도출하기로 하고, CEO가 저녁 무렵 방문하여 실행방안을 확인한 후 추인하여 실행하도록 하자는 계획이었다. 어떤 심각한 얘기와 아이디어가 나올지 모르니까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핵심 임원이 아닌 팀장과 일반직원들은 참석을 배제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회의라도 원활하게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회의에 프로젝터, 노트북 등 필요한 기자재와 논의에 필요한 자료들 그리고 결과를 정리해야 할 노동력(?)이 필요했으니, 핵심 임원이 아니고 유일한 보조 역할로 내가 회의에 동원되었었다.


워크숍 당일 양재동의 모 호텔에 모인 임원들은 저마다 현재의 어려움이 언제쯤 해소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해소될 수 있을지 막연하다는 말들을 주고받다가 하나 둘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옥을 지방에 위치한 계열사의 공장으로 이전하자 주장했고, 그러자 어떤 이는 그러면 우수 인재가 회사를 탈출할 거라며 반대했다. 당시의 CFO는 효과에 대한 판단은 나중에 하더라도 가능한 방법을 쭈욱 얘기해보자고 하였고, 격론 끝에 10 여개의 비상경영 대안과 그 예상 효과가 제시되었다.


개중에는 임금 삭감, 연봉 동결 선언, 인원에 대한 구조조정 의견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제 갓 사원 티를 벗던 나의 생각에는 이런 얘기를 직원들 중에 나 혼자 듣고 있다는 사실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보통 핵심 임원들 간의 비밀스러운 회의 내용을 먼저 듣는다는 건 빠른 정보 획득으로 남들과 다른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일이 되기도 하였으나, 이런 얘기는 미리 알아봤자 아무런 이점도 없고 오로지 불안한 마음만 남보다 먼저 생기는 정보일 뿐이었다.


오후 네시쯤 예정되어있던 CEO의 도착 즈음에 맞춰 나는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비상계획을 타이핑하여 화면에 띄워놓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임원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CEO가 세미나룸에 도착하자, 비상경영 실행계획을 화면에 띄워 놓은 체, 임원 중 가장 선임이었던 CFO가 CEO에게 이야기하였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있는데 이 정도 의견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CEO는 CFO의 말에는 아무 대꾸 없이 화면에 띄워진 비상경영 실행계획을 꼼꼼히 읽어보고 있었다. 세미나룸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고, 습관적으로 열었다가 닫는 CEO 휴대폰의 플립 소리만이 따악 딱 반복되었다.

겨우 한 페이지로 정리된 계획을 읽는 데는 한 5분 정도 걸렸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 시간이 적어도 한 시간은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지고 있었고, 아무도 정적을 깨고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짧지만 길게 느껴진 정적을 깬 것은 결국 CEO 였다.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연 CEO의 얘기는 내가 예상했던 내용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CEO가 효과적인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고 임원들을 몰아붙이고, 좀 더 과감한 계획들을 주문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지만, CEO의 반응은 그런 방향이 아니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회사가 지금 이런 위기에 처하게 된 건 내 잘못이 가장 큽니다. 돌이켜보면 몇 가지 전략적 판단 미스가 이런 상황에 이르는 원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안된 계획들은 모두 직원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네요. 제가 CEO로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데 직원들에게 먼저 저런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제가 주주들을 찾아가서 부탁드리고 우리가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설득해서 해법을 찾겠습니다. 자 워크숍은 이만하고 저녁이나 하러 갑시다."


그리고, CEO는 바로 일어나서 임원들을 독려하며 두 시간 후에 예약되어있던 식당으로 앞당겨 출발하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정리된 워크숍을 혼자 남아 정리하면서, 조금 전에 보았던 CEO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평소 회의에서의 꼼꼼하고 디테일한 모습과 달리 좌중에 스스로의 부족했던 점을 터놓고 책임을 떠안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은 평생 보지 못했던 거인의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CEO는 본인이 공언한 대로 회사를 턴어라운드 시켜나갔다. 주주들을 찾아가 증자의 필요성을 설득해 이끌어내고, 독하다 싶을 정도로 전 직원에게 영업을 몰아붙여 고객을 확보하고, 몇 해 뒤에는 회사의 창립 이후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성과급이 지급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CEO의 공언대로 그 과정에서 회사의 사옥을 옮기거나 강제로 인원을 구조조정하는 일 같은 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직원들이 고생스럽게 그 시절을 버텨내며 노력한 결과로 당시의 위기는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양재동 호텔의 세미나룸에서 유일한 직원으로서 겪었던 경험은 20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무서운 주제의 심각한 회의였음에도 그 기억이 재밌게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그때 볼 수 있었던 일반 임원들과 달리 CEO가 가진 책임의 무게, 위기 극복의 의지, 그리고 결국 실현해 낸 과정을 처음부터 모두 볼 수 있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겐 명암이 있기 때문에 그때 경험한 CEO가 그 일이 있었던 전후로 항상 옳은 결정과 멋있는 모습만 보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날 그때 보여준 모습만으로 본다면 그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보았던 어떤 CEO 보다 멋있었다.

부하에게 사과할 줄 알고, 책임을 미루지 않으며, 직원을 아끼고, 반전을 기획하고, 의지로 실현해 낸 그런 모습이었으니 누가 멋있게 보지 않을까.

근데 그 자리에서 그나마 관찰자적 입장으로 상황을 경험한 게 나밖에 없으니 내가 기억을 글로 남겨 놓고자 한다.


잘 정리해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내가 경험한 CEO들의 긍정적인 모습과 아쉬웠던 모습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 될 수 있을 그런 책을 써보는 게 개인적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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