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것처럼 보이고 싶을 뿐

by 랜덤초이

회사가 창립된 지 2년여 만에 새로운 CEO가 부임해오게 되었다.

새로 취임한 CEO는 직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서 현장의 문제를 확인하고 경영에 반영하겠다고 선언한 후, 누구든지 CEO에게 직접 E-mail을 보내라고 독려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취지를 이해하고 회사에 대한 개선의견을 CEO에게 메일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타고난 성격 상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말을 듣고 CEO에게 진짜로 메일을 보냈다.

당시 경쟁사들은 그들의 서비스를 광고하기 위해 트렌디한 모델들을 활용하고 고객 경품 행사에 사용하는 상품 하나도 럭셔리 굿즈나 유행하는 첨단 전자기기를 제공하여 그들의 이미지를 그런 상품들과 비슷한 이미지로 인식되게 운영하였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경쟁 광고를 하면서도 인지도가 낮은 무명 모델을 활용하였고, 경품 프로모션을 해도 무료 이용권이나 순금 부적 같은 것을 경품으로 활용하여 20대의 젊은 사원이던 나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비교되어 올드하고 고리타분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안타까워 우리 회사의 광고 프로모션에 대한 효과를 검토하고, 전달 방식을 개선하자는 내용의 글을 메일로 써서 CEO에게 보냈던 것이다.


한 주 정도가 지나는 시점에 CEO의 답장을 받았다.


“OOO님의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의견은 담당 부서에 전달하여, 회사의 발전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개선 검토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훌륭한 의견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정도의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짧은 답장을 보며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회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들어 내심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 팀원들과 꼭대기층의 사원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회사 엘리베이터로 11층에 위치한 팀으로 이동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광고홍보팀의 김 과장이 우리 팀의 황 대리를 발견하자 눈을 부릅뜨고 짜증 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야 황 대리 너네 팀에 OOO(내 이름)이라고 있냐? 아이 그 새끼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 진짜.”


나는 갑자기 내 이름이 욕과 함께 불리는 상황에 놀라 조용히 했고, 눈치가 빠른 황 대리는 질문을 던진 김 과장을 끌고 ‘아니 과장님 왜 그래 …?” 물으며 한층 전인 12층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전에 들려오는 얘기로는 “아니 그 자식이 사장님한테 메일을 보내서 …” 이런 내용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담배 한 대 필 무렵의 시간이 지나고, 황 대리가 한 장의 종이를 들고 내 자리로 왔다.


“야 OOO, 김 과장님이 이것 때문에 그런 거란다. 쯧쯧 넌 CEO가 메일 보내란다고 그걸 보냈냐? 순진한 놈 같으니라고”


황 대리가 전해준 A4 프린트에는 내가 CEO께 보낸 건의사항이 적힌 메일이 그대로 들려있었다. 전달된 이력을 보니 CEO에게 온 메일을 비서가 확인 후, 보낸 이의 정보가 포함된 채 그대로 담당 부서에 토스한 것이었다. 담당 부서 입장에서는 뭐라고든 의견을 적어서 보고 내지는 설명을 해야 했으니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차원에서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CEO 가 현장으로부터 개선 제안을 받고자 하는 건 잘못된 동기가 있을 리도 없고, 그냥 보여주려고 쇼를 한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의견을 제안한 것도 순수하게 회사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충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건 왜일까?

제언된 의견은 잘 모아 검토와 반영이 필요한 것만 추려서 맥락을 감안해 지시하면 되지, 개별적인 이메일을 그냥 그대로 포워딩하니 이런 일이 생긴 거가 아닌가?


화를 냈던 김 과장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검토 지시를 받게 된 것에 대해 당황스러웠겠고,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려주었으니 짜증 낼 대상도 타겟팅이 되는 게 당연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게 건의한 사람에 대한 분노로 까지 표출되는 건 오버가 아닐까?


그 후로 나는 CEO에게 개인적인 의견을 담아 이메일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CEO의 선의도 직원의 선의도 그 선의만으로 기대한 효과가 나오는 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통상 CEO들은 현장경영을 외치며 다양한 방법으로 현장의 의견을 듣고자 한다.

위처럼 직원에게 직접 건의를 독려하기도 하고, 직접 간담회를 갖기도 하고, 현장에 방문하여 직원들에게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게 어떤 방법이든 CEO는 진짜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뭐 어쩌면 어떤 CEO는 듣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정도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진짜 현장의 의견을 듣고 싶다면 CEO는 조금 더 디테일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자리를 깔아놨으니 너희는 편안하게 의견을 말해다오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환경이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리더가 진짜로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그냥 판을 까는데서 더 나아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현장과의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을 거라면 안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직원들이 소통에 대해 실망을 경험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그 채널은 시간과 노력만 소모할 뿐 조직에 도움되지 못하는 것을 많이 경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글을 보더라도 지금 시대에 조직 내에서 뭔가 개선을 제안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의 사례를 보고 미리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시대는 많이 바뀌었고 사내외로 여러 소통 채널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런 것을 잘 활용하면 원하는 제언이 가능할 것이다.


너바나의 커트코베인이 그랬지 않나

"젊은 날의 의무는 부패에 맞서는 것이다"


꼭 부패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게 있다면 욕 좀 먹더라도 당당히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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