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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Jun 01. 2024

빛나는 후회

만화 ‘슬램덩크’는 주인공 강백호가 농구부 주장의 여동생에게 반해 북산고 농구부에 입부하면서 선수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우리나라에선 1992년 연재를 시작해 당시 신드롬 수준의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다.

2023년에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하면서 또다시 과거의 인기를 재현해 보이기도 했다.


보통 잘된 작품들이 그렇듯 '슬램덩크'는 주인공 말고도 여러 캐릭터들이 사랑받았다.

서태웅/ 채치수/ 송태섭 등 북산고등학교 농구팀 이외에도 정우성/ 윤대협/ 이정환 등 상대팀의 선수들까지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사랑받았고, 그건 캐릭터마다 보인 각각의 서사가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어 독자들이 저마다 마음 가는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중 특히 주인공에 필적할 인기를 끄는 등장인물이 '정대만'이다.

작년 애니메이션 개봉 당시에 쏟아진 수많은 기사 중에는 '슬램덩크'의 최애 캐릭터를 꼽는 내용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항상 단골로 상위권에 랭크되는 캐릭터가 '정대만'이었다. 


아마 사람들은 저마다의 최애가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 '정대만'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만화를 본 누구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고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정대만이 이렇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속에서 '정대만'은 고등학생이라는 나이에 비해 인생의 부침(浮沈)을 가장 크게 겪는 캐릭터이다.

중학생 시절 팀을 우승으로 이끈 MVP 출신의 유망주, 숱한 농구 명문고를 마다하고 존경하는 안감독을 쫓아 북산고에 진학, 연이은 부상으로 농구를 포기한 체 불량학생으로 2년간의 방황, 송태섭 그리고 강백호와 싸우는 빌런을 거쳐 북산고 농구부로 복귀, 그리고 팀의 핵심 선수로 다시 떠올라 시합마다 승부처에서 활약...


롤러코스터 같은 과정을 거치며 정대만은 사람들 뇌리에 남을 명대사를 남겼다.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포기를 모른다는 정대만의 대사는 안감독이 정대만에게 했던 "포기하면 그 순간 시합 종료예요."라는 말과 함께 숱한 사람들의 가슴에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명대사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정대만'을 좋아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의 대사 중 인간적인 독백이 하나 더 기억에 남는다.


전국대회 진출을 결정짓게 될 능남고등학교와의 시합 후반전

정대만은 혼신의 힘을 쏟아 시합에 임하지만 체력의 고갈로 더 이상 뛸 수 없게 되어 교체되고 만다.

힘없이 계단에 걸터앉은 정대만은 나직이 내뱉는다. 


"젠장... 왜 난 그렇게 헛된 시간을... (くそ... なぜ オレはあんなムダな時間を... )"


농구를 그만두고 방탕하게 보낸 지난날을 후회하며 시합에 뛰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완전히 연소해 버린 체력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후회 밖에 없었기에 '정대만'의 후회는 더 치열하고 처절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며 후회를 경험한다.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후회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도 있다.

그 흔한 후회의 순간 중에 후회하고 있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경우는 그다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도 '정대만'의 후회가 그리고 후회하며 내뱉은 한 줄의 독백은 희한하게도 멋진 후회로 기억에 남았다.  


'정대만'의 후회가 평범한 후회로 보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그의 후회는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후회였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노력하다가 어물쩍 타협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꺾이지 않고 지향하는, 어떤 목표를 지켜가기 위한 상태에서 그것에 반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후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의 후회는 뭔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지고, 그 후회를 양분으로 삼아 더 좋은 더 나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정대만의 후회는 꺼진 모닥불에 살아남아 있는 불씨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기회가 주어질 때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즉 정대만이 왜 '불꽃남자'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만화 속 이야기에서 애써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돌리는 건 ...

세상이 만화처럼 공정하거나 상식적이지 않아서이다,

그러니 만화 속에서 애써 노력하는 캐릭터에게라도 열정적인 팬심을 보일 수 밖에 없다.


후회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란 믿음이 있을 때 빛나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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