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친구에게

by 랜덤초이

퇴근버스에서 내려 혼자 걷다가 문득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친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 키 순서대로 배정된 번호에서 친구는 61번, 나는 62번이었다.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고, 키가 비슷해 가까운 자리에 앉으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단순히 자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키가 커져 운동신경이 따라주지 못한 것도, 공부가 어중간해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던 것도 우리의 닮은 부분이었다. 친구는 수학에 강했고, 나는 국어와 암기 과목을 더 잘했다. 그래서 서로 모르는 것을 묻고, 문제집을 골라주며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의 부모님은 전라도 광주 출신이었다.

그 시절은 지역감정이 극심해 “삼성은 전라도 출신을 뽑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떠돌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를 알게 되며 지역감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배웠다. 사람을 태어난 지역으로 평가한다는 건,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하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친구는 누구보다 착했고,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를 위해 주먹을 휘두를 만큼 정의로웠다. 비록 싸움은 서툴렀지만, 그 모습마저 인간적이었다.


친구가 들려주던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를 당시의 나로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언론조차 외면하던 시절이라, 나는 그 이야기를 1929년 학생 항일운동쯤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여러모로 내 성격 형성에 좋은 영향을 준 친구였지만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우리는 갈라졌다. 친구는 상문고, 나는 휘문고로 진학하면서였다.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메신저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다른 학교로 가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우리는 가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활을 응원했다.


다시 만난 건 1990년, 국기원 옆 국립도서관 열람실에서였다. 주말에 찾은 도서관에서 반가움에 마주한 우리는, 수험생의 고단함을 위로하며 미래의 꿈을 나누곤 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어서 도서관에 가도 점심 전에 슬그머니 빠져나와 영화를 보러 다니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다.

“너 자꾸 공부 안 하면, 너희 엄마한테 이른다.”


장난스러운 협박이었지만, 그 속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입시가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각자의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느라 자주 보지 못했지만, 대학에 가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다행히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친구 역시 원했던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다시 보자는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1월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를 그 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그해 입시에 실패한 다른 친구와 여행을 다녀온 나에게 같은 동내에 살던 중학교 동창 녀석이 믿기 힘든 말을 전했다, 나랑 보기로 했던 그 친구가 천주교회에서 감전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이유로 누군가를 잃은 나는, 도무지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문을 뒤져 기사를 확인하고, 이미 발인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친구가 보내준 편지를 꺼내 읽으며, 나를 걱정하던 그 선한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득해졌다.

아마 그 친구는 내가 알던 친구들 중 가장 성실하고, 착하고, 정의롭고, 의리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안타까운 사고를 당해야 했을까.


35년이 지난 오늘, 문득 그 친구가 떠올랐다. 여전히 생생한 기억 속에서도 순간 이름이 헷갈렸다.

다행히 곧 떠올랐지만, 혹시라도 그 이름을 잊어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늘 나를 걱정해 주던 그렇게 착한 친구가 짧은 생을 살다 떠났는데, 내가 그 이름조차 잊는다면 너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글로 남겨둔다.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던 너의 이름을.


상현아, 어디서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조폭과 정치의 유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