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by 랜덤초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연말 임원 인사를 앞두고 그룹의 인사 업무를 총괄하는 CHO가 주력 계열사의 부회장을 찾아갔다.

전문경영인으로서 정점에 올라있던 부회장에게 CHO가 건넨 말은 서늘한 퇴직 권유였다.

"회장님의 뜻입니다. 이제 용퇴해 주셔야겠습니다."


그 서슬 퍼런 선고 앞에 부회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답했다.
"그래? 알겠네.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면 바로 그만두도록 하지."


결과는 반전이었다.

부회장은 그해 인사에서 살아남았고, 그 후로도 수년간 건재를 과시하다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만두라는 권유를 받고도 어떻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권유는 회장의 진짜 의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회장은 어떻게 그 서슬 퍼런 '회장님의 뜻'이라는 말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핵심은 권력이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에 있다.

조직 내에서 권력의 실체는 종종 '말' 그 자체보다 그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암묵적인 두려움'에 의해 완성된다.


CHO가 내뱉은 "회장님의 뜻"이라는 말은 일종의 심리적 성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권력의 실체를 확인하려 들기보다, 자신의 내면에 투사된 공포를 먼저 마주한다.


권위자의 이름이 빌려진 순간, 질문은 차단되고 복종만이 유일한 생존 전략으로 남는다.

권력은 바로 이 '대항하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를 먹고 자란다.



부회장은 이 심리적 트릭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CHO라는 '메신저'가 휘두르는 권력이 사실은 회장의 실제 의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혹은 회장의 의중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대면(對面)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이상 '미완성된 권력'임을 간파했다.


그가 "회장님께 직접 듣겠다"라고 응수한 것은 단순히 자리에 연연한 고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메신저 뒤에 숨은 실체 없는 권력의 안개를 걷어내고, 권력의 본체와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심리적 주도권의 탈환이었다.

만약 CHO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회장의 의중을 과장했거나 가공했다면, 부회장의 이 정공법은 메신저를 당혹스럽게 하는 치명적인 반격이 되었을 것이다.


권력은 반응하는 자의 것이다

결국 조직 내에서 휘둘러지는 권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건 상급자의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 하급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확인하기 두려운 심리적 위축'의 합산일지 모른다.


부회장이 수년을 더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회장과 특별한 직보 채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심리적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그 실체를 끝까지 확인하려 했던 정신적 독립성 덕분이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때로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의 그림자를 보고 먼저 주저앉는 우리 안의 나약함이다.

물론 사사건건 메신저를 의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꼭 필요한 순간마저 아무런 의심 없이 눈 감아 버린다면 세상은 호가호위하는 사람들만 활개치는 놀이터가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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