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의 그림자

by 랜덤초이

우리나라는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스마트폰 보유율과 같은 각종 정보화 통계 순위에서 늘 세계적으로 수위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명실상부한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인프라는 공기나 물처럼 당연한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 속에서 '대기 시간'이 사라진 초고속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클릭 몇 번으로 신선한 식재료가 새벽 문 앞에 놓이고, 관공서에 가지 않아도 복잡한 민원서류를 즉시 발급받는 디지털 원스톱 서비스는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를 가장 효율적인 편리함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 역시 이러한 편리함을 시대의 혜택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속도를 즐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견고했던 나의 생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속 신고를 위해 필요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디지털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물리적 장벽’에 부딪힌 것이다.


상속 업무는 보안과 확인 절차가 까다로워 은행과 증권사 몇 군데를 반드시 직접 방문해야만 했다. 그 과정은 내게 평소에 생각지 못하던 어려움을 느끼게 했고, 내가 알던 세상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현실은 오프라인 객장의 변화였다.

내가 기억하던 과거의 은행은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이라는 명목하에 금융권이 오프라인 점포를 급격히 줄이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절대적인 점포 수가 줄어들자 남은 영업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되면서 대리인에게 요구되는 서류와 증명 수준은 매우 까다로워졌고, 상속인이 직접 방문하는 것이 그나마 절차가 간소하다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기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 피상속인의 계좌 거래 내역을 떼는 일만으로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생업이 있는 직장인이 이런 단순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며칠씩 시간을 내기란 현실적으로 가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은행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집 주변에서 몇 군데는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권사로 넘어가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확인해 보니 신한은행은 서울에 약 280개의 영업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대형 증권사인 삼성증권조차 서울 전역에 단 11개의 영업점만을 두고 있었다.

서울 하늘 아래 단 11곳뿐인 창구를 찾아가는 이동 시간과 대기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에 단 한 곳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는 1초 만에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시대에, 정작 그 계좌의 주인임을 증명하고 내역을 확인하는 일은 구한말의 파발마를 기다리는 것처럼 더디기만 했다.


이 고단한 과정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스마트폰으로 단순한 업무만 처리하며 ‘손 안의 편리함’에 취해 있던 이면에는, 정보화로부터 소외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과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 세대의 고통이 거대한 절벽처럼 서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효율성을 이유로 대면 창구를 폐쇄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흐름은, 역설적으로 대면 업무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간적·물리적 비용’을 전가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마주한 금융사 직원들의 얼굴에서도 과거의 여유와 매너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줄어든 점포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의 독촉과 민원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미소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과중한 업무량에 지친 그들의 자조적인 표정과 권태 섞인 목소리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과 제공하는 사람 모두가 이 비효율적인 효율화 시스템 속에서 함께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우리 사회가 자랑하는 ‘초고속 디지털 사회’는 특정 계층과 특정 업무에만 허용된 반쪽짜리 영광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고도화될수록, 그 시스템에 올라타지 못하거나 시스템이 외면하는 영역에 머무는 이들의 소외감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물리적 거리를 헤매며 느꼈던 나의 무력감은, 아마도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소외 계층의 일상이었을 것 같다.


사람들은 반드시 화려한 정보화 통계 순위의 빛에 가려진 짙은 그림자도 알아야 한다.

기술의 진보가 누군가에게는 편리함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절망스러운 장벽이 된다면 그것을 마냥 칭송할 수 있을까 싶다.


사라져 가는 오프라인 창구에 대한 보완책 마련은 물론,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한 세심한 사회적 설계가 절실해 보인다. 진정한 정보화 강국이란 단지 네트워크 속도로 가려지는 게 아니어야 할 것이다.

효율성이라는 잣대 뒤에 숨겨진 사람들의 불편함을 없애고, 대면과 비대면의 균형을 고민하는 사회적 노력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가 누리는 이 편리함이 누군가의 희생이나 소외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이 되지 않도록, 기술의 속도만큼이나 깊은 ‘공존의 철학’이 뒤따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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