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기술

by 랜덤초이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투표'는 공동체의 의사를 하나로 모으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다.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라는 4대 원칙 중 비밀선거의 원칙은 유권자가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간섭 없이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이 숭고한 원칙이 기업 경영이라는 특수한 조직 구조 안으로 들어올 때, 특히 리더의 불순한 의도와 결합할 때 투표에 의한 다수결의 결과는 때로 가장 교묘하고 비겁한 책임 회피의 도구로 변질된다.


다음은 이를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기업이 중요한 기업 인수(M&A)를 앞두고 있던 당시, 인수 대상 회사의 기업가치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결함이 드러났고, 실무진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인수를 강행할 경우 닥쳐올 후폭풍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쩌면 기업의 운명을 결정지을 절체절명의 순간,

경영자가 선택한 방식은 놀랍게도 '지극히 민주적인 투표'였다. 그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수를 강행해야할지, 가격은 어떻게 조정할지를 '구두'로 묻고, 결과를 '거수'투표로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구성원의 의견을 경청하고 중지를 모으는 합리적인 리더십처럼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무책임한 책임 전가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 투표의 핵심 가치인 '비밀 선거의 원칙'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인사권이라는 실질적 생사여탈권을 쥔 CEO 앞에서 행해진 거수투표는 투표가 아닌 '충성 서약식'에 불과했다



유권자들은 기업의 미래라는 대의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권력자의 심기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침묵은 동의로 간주되었고, 소수의 우려는 다수의 거수 속에 파묻혔다. 결국 명백히 드러났던 부실의 징후들은 "민주적 합의"라는 거대한 명분 아래 교묘히 감춰졌고, 상황은 경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조직에서의 의사결정은 권한과 책임이 일치해야 하는 수직적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경영자가 일반 직원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를 독점하고 높은 보상을 받는 이유는, 불확실성과 리스크가 가득한 상황에서 외로운 결단을 내리고 그 결과에 대해 독점적인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리더의 진정한 소명은 다수결이라는 숫자의 성벽 뒤로 숨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내가 책임진다'는 단호한 언어로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사례 속의 CEO는 결정의 순간에는 '다수결'이라는 민주적 절차의 뒤로 숨어버렸고, 결과가 참담한 손실로 돌아왔을 때는 "여러분이 선택한 결과"라며 책임을 분산시키는 전형적인 리더십의 직무유기를 보여주었다.


결국 부실한 기업을 인수한 대가는 혹독했다.

회사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으며, 그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부실 인수의 '공범'이자 '들러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더한 문제는 그런 과정을 지켜본 조직 내에 "결국 답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이용당할 뿐"이라는 냉소주의가 독버섯처럼 퍼졌다는데 있다.

리더에 대한 신뢰와 조직의 도덕적 기강은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민주적 의사결정은 단순히 손을 드는 행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구성원이 어떤 불이익도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이 담보될 때, 그리고 리더가 투표라는 민주적 형식 뒤에 숨어 자신의 책임을 덜어내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책임지지 않는 리더가 선택하는 투표라는 방식은 민주적 장치가 아니라, 조직의 근간을 흔드는 가장 위험한 정치적 연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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