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경영

by 랜덤초이

2004년, 통신 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FMC'라는 약어가 업계의 화두였다.

유선(Fixed)과 무선(Mobile)의 융합(Convergence)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곧 다가올 통신 시장의 거대한 대세이자 미래로 여겨졌다.


그해 자동차 회사로 이직한 나는 새 직장의 전략 보고서에서 이 익숙한 알파벳을 발견하고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문서를 읽어 내려갈수록 문맥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자동차 산업에서의 'FMC'는 유무선 통신의 융합이 아니라, '풀 모델 체인지(Full Model Change)', 즉 뼈대부터 외관까지 자동차 모델의 완전한 세대교체를 뜻하는 단어였다.


같은 영문 약자라도 자신이 속한 세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사실은, 내게 늘 전체 맥락 속에서 텍스트의 쓰임과 이면을 되새겨보는 습관을 길러주었다.


자동차 회사에서 마주친 생소한 약자 중에는 'HJN', 'SJN'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사전을 뒤지고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았고, 앞뒤 문맥으로도 유추하기 힘든 이 기묘한 약자의 정체는 결국 선배에게 묻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것은 대단한 전문 용어가 아니라, 그저 '회장님(Hoe-Jang-Nim)', '사장님(Sa-Jang-Nim)'의 한글 발음을 영문 이니셜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명확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의 결합일 거라 짐작했던 나는, 직함을 마치 암호처럼 부르는 그 1차원적인 방식이 퍽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사회생활의 폭이 넓어지면서, 나는 높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는 것이 한국 사회에 일종의 굳건한 불문율처럼 통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무원들과의 회의에서 청와대는 으레 'BH(Blue House)'라는 약어로 불렸고, 국가적인 행사를 기획할 때도 대통령은 명확한 직함 대신 'VIP'로 통칭되었다.


명확한 지칭을 피하고 우회적으로 부르는 것이 윗사람에 대한 깍듯한 예의이자 고도의 격식인 양 포장되는 광경을 보며, 내 머릿속에는 묘한 기시감과 의문이 교차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권력의 실체를 이토록 신비화하는 것일까.


나이가 들고 조직의 생리와 의사결정의 민낯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지금, 그 오랜 의문은 보다 근본적이고 서늘한 문제의식으로 발전했다.


특정 대기업의 경우, 그 어떤 회의 자료나 문서에도 '회장'이라는 단어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자동차 회사의 'HJN'이나 'SJN' 같은 촌스러운 약자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마치 처음부터 이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서류상에 어떠한 지시 이력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최고 권력자가 회사의 경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는 권한은 막후에서 전방위적으로 행사하되, 훗날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질 근거는 단 한 줄도 남기지 않겠다는 정교한 은폐의 의식에 가깝다.


이러한 기형적인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일까?

명확한 지휘 계통과 책임의 소재를 남기지 않은 채 중대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면, 대체 누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조직 내에 어떤 합리적인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는 지시를 내린 특정 개인에게는 완벽한 면피용 방패가 될지 모르나, 조직 전체를 병들게 한다.

실체와 근거가 불분명한 '위의 뜻'이라는 유령 같은 지시가 떠돌게 되고, 결국 누군가의 묵시적인 분위기만으로도 구성원 모두가 맹목적으로 순응해 버리는 수동적인 조직이 만들어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권한의 행사와 책임의 무게가 투명하게 일치할 때 비로소 조직이 건강하게 작동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 서로의 권한을 명확히 인정하고, 어떠한 판단을 내렸다면 그 근거를 당당히 기록하며 일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HJN', 'SJN'이라는 다소 우스운 약자를 써가면서도, 기어이 보고서 결재란에 그 이름을 명시하고 서명을 받아가며 책임 경영을 하던 그 자동차 회사는 지금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

반면, 최고 권력자의 존재와 판단을 베일 뒤에 숨긴 채 '그림자 경영'이 이루어지는 대기업은, 누구의 책임인지도 모를 수많은 패착들 속에서 서서히 과거의 영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 선명하고도 씁쓸한 대비가 오늘따라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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