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풀어쓰기

by 랜덤초이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사장님’이라는 투박한 호칭은 ‘CEO’라는 세련된 직함 뒤로 밀려났다.


글로벌 경영 환경에 발맞추려는 의도일 수도, 혹은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지위를 명확히 하려는 시대적 요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 마주하는 ‘사장’이라는 호칭 속에는 CEO라는 단어가 담지 못한 특유의 정겨움이 배어 있다.


어쩌면 우리 무의식은 CEO라는 단어를 거대한 대기업의 견고한 성벽을 지키는 전문 경영인의 전유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랜 시간 대기업의 품 안에서 다양한 리더들의 의사결정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고뇌와 선택을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하며, 나는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과 경계해야 할 태도가 이미 ‘CEO’라는 세 글자 안에 운명처럼 새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 조직을 숨 쉬게 하는 리더의 CEO는 긍정의 언어로 채워진다.
그들에게 C는 Communication(소통)이다. 이들은 명확한 비전을 공유하고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조직 내에 단단한 신뢰와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토양을 다진다.

E는 Empowerment(권한 위임)다. 실무자의 역량을 믿고 기꺼이 권한을 내어줌으로써, 인재들이 자율성이라는 양분을 먹고 성과라는 꽃을 피우게 한다.

마지막으로 O는 Objective-driven(목표 지향)이다. 확고한 철학을 나침반 삼아, 위기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조직의 방향타를 잡는다.


반면, 조직을 서서히 병들게 하는 리더의 CEO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 있다.
소통이 머물러야 할 자리에 Control-freak(통제 집착)이 들어설 때, 마이크로매니징은 구성원의 창의성을 질식시킨다.

권한 위임 대신 Ego-centric(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매몰된 리더는 타인의 조언을 묵살한 채 자신의 안위와 평판만을 성벽처럼 쌓아 올린다.

무엇보다 목표가 아닌 Opaque(불투명함)의 늪에 빠진 리더는 의사결정을 밀실로 가져가 조직 전체를 혼란의 안갯속으로 밀어 넣는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 두 극단의 리더가 공존하는 세계다. 때로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이 상반된 특성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기도 한다. 결국 CEO라는 직함은 고정된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그 세 글자를 어떤 가치로 채워나갈 것인지에 대한 ‘매 순간의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인 셈이다.


내가 기억하는 훌륭한 리더들은 예외 없이 전자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자신을 군림하는 자로 정의하지 않고, 조직의 잠재력을 길어 올리는 전략가이자 조력자로 정의했다.


리더가 올바른 방식으로 높은 곳을 지향할 때, 구성원들은 비로소 리더의 뒷모습을 이정표 삼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속 용사 힘멜이 동료들에게 남긴 선한 영향력처럼 말이다.)


국내 상장사 CEO의 평균 임기는 3년 남짓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짧다 말하겠지만, 한 사람의 철학이 조직의 DNA에 각인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대통령의 5년도 국민의 판단 앞에서는 길게 느껴지곤 하는데, 기업의 세계에서 3년이란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은 시험대다.


CEO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순히 숫자로 된 실적을 쌓는 기간이 아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조직이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어떤 ‘C-E-O’를 유산으로 남길지 결정하는 여정이다.


통제와 독단으로 찰나의 성취를 맛보기보다, 소통과 위임을 통해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남기는 진정한 리더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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