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낯익은 연예인들의 입에서 귀에 익숙한 용어들이 언급되는 걸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JTBC 채널에서 지난 3월부터 과학토크쇼를 표방하고 새롭게 론칭한 “과학아~덤벼라! 국과대표” 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강호동과 이진호 등 인기 연예인들이 해당 회차의 주제에 맞게 출연한 분야별 전문가와 과학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의 토크쇼였다.
'알쓸신잡'이나 '알쓸범잡' 류의 프로그램이 다수의 전문가와 소수의 비전문가 MC로 구성된 포맷이라면 "국과대표"는 반대로 다수의 비전문가가 한 명의 전문가와 얘기 나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고, 일방적인 강연 방식이 아니라 설명과 질의응답이 섞인 대화 방식이라서 '차이나는 클라쓰'와도 차별화된 구성이었다.
아무래도 어려운 과학 얘기를 다루려다 보니 일반적인 지능과 지식수준을 가진 사람들을 다수 포함시켜서 전체적인 콘텐츠의 수준을 일반인들에게 맞추려 한 의도로 보였는데, 공개된 기획의도에도 '과학을 잘 알지 못하는 “과알못”의 시선에서 우리 주위에서 보고 듣는 과학 관련 주제를 파헤친다'라는 내용이 포함된 걸 보니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구나 싶었다.
우연히 보게 된 3회 차의 주제는 ‘'호모 커뮤니쿠스! 인류는 통신의 동물인가?'’라는 내용이었다.
의도치 않게 채널을 돌리다가 십여 분 보게 된 내용이 다였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할 만큼 소견이랄 게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침 내가 종사하는 업계와 관련된 내용이 소개되어서인지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시청한 부분에선 인지과학자인 김상균 교수가 전문가로 출연하여 우리나라가 CDMA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 한 부분부터 시작하여 LTE 가 상용화된 시점까지의 내용들을 간략히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2G부터 4G까지의 시기인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후반까지의 일인 것이다.
같은 시대를 업계 내부에서 경험한 사람으로서 프로그램에서 설명된 내용이 자세히 무엇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소재만으로 반가운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TV 예능에서 그것도 강호동 씨 같은 인기 연예인의 입에서 회사에서 주로 이용하던 전문용어가 얘기되는 모습은 무척이나 생경하고 신기하게 다가왔다.
전문가분이 통신기술 방식 중 TDMA와 CDMA의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TDMA는 한방에 모인 여러 사람이 시간을 나눠서 얘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기술 원리를 설명하던 부분은 나 역시 신입사원 교육에서 들어봤던 예시였던 터라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2G 와 3G, 그리고 4G LTE(Long Term Evolution)까지 통신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는 잠시 동안 내 머릿속에는 20여 년에 이르는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게 되었다.
3G를 설명하는 동안에 전문가는 주머니에서 하나의 핸드폰을 꺼내면서 이동통신 역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한 인물을 소개했다.
그가 소개한 휴대폰은 바로 아이폰이었고 인물은 당연히 스티브 잡스였다. 이런 부분을 설명하다 보니 개그맨 이진호 씨는 전문가에게 "그럼 스티브 잡스가 LTE를 개발한 건가요?"라고 물었고,
전문가는 "그건 아니지만 스마트폰이 도입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2007년 처음 출시된 "아이폰"이 글로벌 통신시장에 끼친 변화는 실제로 어마어마했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그로부터 2년도 더 지나서 2009년 말쯤이었지만 아이폰이 가져온 변화는 국내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통신사가 통제했던 모바일 인터넷 이용 환경은 플랫폼 사업자에 의해 강제 개방되었고, 이렇게 도입된 오픈 플랫폼 환경 속에서 앱(APP)을 중심으로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와 콘텐츠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런 과정을 통신사 내부에서 경험한 바는 마치 미국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키고,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된 것 같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C(콘텐츠)-P(플랫폼)-N(네트워크)-D(디바이스) 라는 전통적인 통신사업의 밸류체인에서 플랫폼이 개방됨으로써 모바일 디바이스에서의 서비스와 콘텐츠 유통 권력은 통신사가 아닌 스마트폰 OS 플랫폼 사업자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 같은 상황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상황은 통신사의 서비스 유통권력 상실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주저하는 내부의 판단에 대한 부분이 아쉬움의 대상이 되었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면 빨리 순응하고 새로운 포지션을 찾아야 함에도 과거에 익숙했던 방식으로 새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려는 관성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통신사의 내부에선 스마트폰을 매개로 한 모바일 혁명이 LTE 때문에 이뤄진 거라고 주장하고 통신사가 직접 제공한 서비스가 그 마중물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진짜로 세상이 주목하고 기억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아이폰이 불러온 스마트폰 혁명의 핵심은 오픈 플랫폼이 가져온 오픈 생태계이고 3rd party 개발자의 참여로 다양해진 앱 서비스가 그 주인공이었다고 보는 게 더욱 객관적인 진단이다. 물론 네트워크와 플랫폼 어느 하나 만으로 모바일 인터넷 혁신의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진 않았겠지만 두 가지 중 그래도 더 핵심적인 원인을 찾으라면 그건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성과를 강조하기 위해 원인을 진단하는 척도의 객관성을 잃는다면 그로 인해 감수해야 할 대가가 클 수밖에 없다.
외주 개발을 활용한 통신사의 서비스 제공 방식은 개발의 효율과 경쟁력을 잃었고, 서비스 요금의 고객 청구 방식은 광고 기반의 사업모델과의 경쟁에 내몰렸지만 통신사는 여전히 길을 찾기보다 끝이 정해진 익숙한 길로만 걷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성경 말씀처럼, 이미 개항된 대륙에선 새로운 시대의 규칙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무튼 회사와 관련된 내용의 정보를 회사 밖 콘텐츠로 접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내부의 경직된 해석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해하고 판단된 내용이 공유될 기회가 생길 테니 말이다.
제대로 된 시청 소감을 남기기 위해 몇 주간 재방송을 기다려보고, 시간이 맞지 않으면 다시보기 1,650원(VAT포함)을 들여서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반말로 진행되는 프로그램 컨셉이 영 어색하고, 그런 상태로 전문가 한명과 다수 비전문가들이 대화하는게 불편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짧은 시행착오를 거쳐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