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한 보고의 이면(裏面)

by 랜덤초이


십수 년 간 대기업의 CEO 스탭 부서에서 근무하며 CEO에게 보고되는 여러 문서를 볼 기회가 있었다.
대충 추산해봐도 최소한 천 건 이상의 보고서는 그동안 본 것 같고, 보고 현장에 직접 배석해서 내용이 전달되는 과정을 참관한 것도 그 중 절반 이상은 되는 것 같다.

나 스스로가 CEO에게 보고를 해 본 경험도 백여 회 이상은 되다 보니까 주변과 비교해봐도 이런 정도의 경험이 그리 흔한 건 아니었다.


CEO 보고는 기업의 수장(首長)에게 보고되다 보니 당연히 정성껏 정리된 내용이 대다수였고,
잘 정리된 보고서의 내용을 보는 것과 보고 과정에서 이뤄지는 CEO와 보고자 간의 질의응답을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건 개인적으로 좋은 공부가 되었다.


보고의 대부분은 명료한 주제와 잘 준비된 합리적 근거로 정리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보고서는 사전 지식이 별로 없는 내 눈으로 보아도 뭔가 부족하거나 부실해 보일 때가 있었고 '이런 보고가 왜 필요하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건 좀 근거가 빈약한데...' 하는 내용들도 꽤 있었다. 심지어 어떤 보고는 사실과 다른, 또는 사실보다 과장된 내용으로 포장되어 보고가 이뤄지는 경우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내가 봐도 문제 있어 보이는 내용이 보고될 때면 보고가 진행되는 동안 문제가 되는 내용이 노출되면서 CEO나 회의 참석자로부터 챌린지 당하고 보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걔 중에는 그냥 별문제 없이 보고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CEO에게 보고하는 내용은 보고 당사자의 실무적 의견과 주관으로만 보고서 작성이 마무리되지 않는다. 소속 부서장이 보고서의 내용을 컨펌(confirm)해야만 CEO에게 보고할 내용이 확정되고, 이 과정에서 실무자의 의견보다는 부서장의 의견과 메시지가 반영되게 된다.


그리고 어떤 때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실무자의 의견은 남아있지 않고 완전히 다른 내용의 보고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경우라면 보고자는 실질적인 보고의 주체라기보다는 부서장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최종적으로 CEO에게 보고하는 보고서의 내용은 최소한 임원 레벨의 부서장이 컨펌한 내용이다 보니, 해당 임원의 특징적인 보고 스타일이 내용에 반영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내용 상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실한 보고는 몇몇 부서장의 보고서 작성 스타일이나 습관 같은 것과 맞닿아 있었다.

특정 부서장들에게는 보고에 자주 활용하는 상투적인 기술 같은 것이 있었는데, 자주 보고서를 접하다 보니 그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부실한 보고의 내용을 감추기 위한 가장 흔한 기술은


① 전문가의 권위를 차용하는 경우이다.


보고서의 내용에 전문가의 의견이나 코멘트를 삽입해 사용하는 건 대표적인 설득의 방법이다.

하지만 전문가라는 사람들 중에도 서로 관점이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전문가의 의견을 발췌하여 보고서에 활용하는가 하는 건 보고자가 가지는 판단의 영역이다.

또, 전문가의 의견에는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보고서에 인용할 때는 그 전제조건까지 정직하게 포함하여 전달되는 보고가 드물었다. 때문에 사실 판단에 대한 안목을 높이려면 전문가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신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


전문가 의견을 발췌해서 활용하는 걸 넘어서 아예 사외의 전문가에게 보고서 작성과 심지어 보고의 역할까지도 위탁하는 경우가 있다.

외부의 전문 컨설팅 회사를 고용하는 경우가 그런 예인데, 컨설팅을 받는 이유는 신규사업에 대한 식견(insight)을 얻기 위해서라던가, 기업의 현재 모습을 정확히 알기 위한 객관적 시각을 요구한다던가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컨설팅 회사를 고용하는 현실적인 필요는 보고의 편의를 위한 CEO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정작 회사의 내부 사정과 실력을 정확히 아는 것은 내부 임직원임에도 불구하고 CEO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미 신뢰받고 있는 스피커를 고용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보고서의 문서화 작업은 컨설팅사가 하더라도 보고의 내용에는 내부 직원이 뒤에서 관여하여 보고의 논지와 tone & manner를 조정한다.

때문에 보고의 화자(話者)가 달라지고 문서의 스타일이 다를 뿐 메시지까지 새로운 시각을 담는 경우는 자주 볼 수 없었다.


② 고객 조사를 작위적으로 활용한다


CEO에게 보고하면서 "제 감(感)에는 이렇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없다.

주장에는 당연히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근거와 주장 사이에 논리적 연결고리가 부족하면 메시지의 신뢰도를 챌린지 받게 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 논리적 간극을 메우기 위해 고객 조사를 활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만약 당신이 집을 비운 동안에 집안의 상황을 완벽하게 모니터링할 수 있는 혁신적인 화질의 CCTV가 제공된다면 잠시 체험해보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서는 서비스의 실체를 보여준 적도 없고 이용요금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완벽하게’, ‘혁신적인’, '잠시', ‘체험’ 같은 단어를 이용해서 ‘기대는 높이고 부담은 낮춘’ 질문을 했기 때문에 고객의 반응이 실제 현실의 반응보다 호의적일 수 있다는 것은 예상 가능한 결과이다.

제대로 된 마켓 리서치 기관이라면 저런 식의 설문 구성을 하지 않겠지만, 회사에서 인용되는 보고 속의 퀵 서베이는 비전문가인 직원 스스로가 의도를 가지고 조사하는 경우도 많다.


조사의 설계와 자세한 설문 문항 내용을 함께 살피지 않으면 의외로 그 허실을 확인하기 어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CEO 보고에서 자신들 주장의 약점을 감추고 기대를 높이기 위해 이런 식의 고객 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작위적으로 활용한다.


③ 외부의 리스크와 과장된 공포를 활용


'법령 상의 제약', '정부 규제기관의 개입', '대형 고객의 이탈' 또는 '기업 인수 실패 시 성장 기회의 상실'과 같이 외부적인 리스크를 강조해서 CEO의 의사결정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경우도 있다.


사실 위에 열거한 리스크가 CEO의 의사결정 결과에 따라 확정적으로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어떤 결과가 무슨 의사결정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인과관계도 불확실하고 나중에 이를 증명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치명적일 수 있는 위협적 결과만을 강조하여 CEO의 선택을 압박하는 것은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온전히 CEO에게만 미루는 것이므로 옳지 않은 보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오히려 그런 정도의 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적절한 상황 관리와 대안을 구상하는 것이 제대로 일하는 모습일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최종적인 의사결정 앞에 CEO를 내모는 것은 무능했거나 어쩌면 의도를 가지고 그런 상황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CEO에게는 환경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에서의 정보가 물 흐르듯 전달되어야 이와 같은 보고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CEO들은 자신이 이런 선택의 궁지로 내몰리는 일을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에 이 같은 보고를 시도하는 것은 위험한 방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종종 목격되는 보고의 기술이었다.

④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의미 부여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실한 보고는 의지와 당위성을 근거로 허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였다.
기업이 기존의 사업영역에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경우, 회사는 Inorganic growth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회사를 인수합병 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게 되고 그런 필요 자체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수 대상이 기존 사업보다도 성장이 정체되어 있거나 이미 사양화되고 있는 사업영역의 회사라면 애초에 주장한 인수 추진의 의도나 의미와 맞지 않는다.


신규 서비스 추진 계획을 보고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미 시장에서 검증되어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경쟁 서비스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약간의 차별적 기능을 추가해서 제공하면 우리 서비스로 이용자가 쉽게 전환해 올 것이란 기대는 황당하고 나이브(naive)하기까지 하다.

경쟁 서비스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서비스 이용의 확산은 기능적 차이만으로 성취되기 어렵고 고객 반응을 봐가면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 일임에도 마치 한두 가지 차별점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식의 부풀려진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보고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경우 서비스의 개발까지가 역할인 사람들이었고, 서비스를 운영하고 그 결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식의 보고를 하기 힘들어했다.


과제에 대해 풀 커버리지의 책임의식을 갖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민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여 가져 가지만, 자신이 일부 기능적인 역할 만을 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맡은 부분만 신경 쓰고 나머지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지를 내세워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하는 보고의 경우, 보고자에 대한 신뢰와 신용이 내용의 판단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담보가 부족한 거래에서 신용이 중요하듯 보고의 대부분이 당위성과 의지로 채워지다 보면 말 잘하고 질문에 대답 잘하는 사람들이 보고 결과를 유리하게 끌어가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보고의 결과이지 실제로 해당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는 당위성과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문제는 말 잘하는 보고자들 역시 그들의 보고가 계획한 대로 성과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오직 CEO의 앞에서만 그들이 가진 성취 의지로 강력하게 주장했을 뿐 보고가 끝나고 나면 제시했던 그들의 계획보다는 CEO에게 보고된 결정사항이라는 이유로 무리하게 타 부서의 협조와 희생을 강요하여 부서만의 이익을 챙기려는 경우가 많았다.


⑤ 부실 보고의 종합 예술, 희생양 세우기


사실 보고에 앞서 CEO가 생각하는 기대 수준을 정확히 알고 100% 만족스러운 보고를 준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그런 게 100% 가능할 리가 없다.


어떤 프로젝트는 전혀 가능성이 없더라도 그렇게 적어갔다가 CEO로부터 생각이 부정적이라는 얘길 들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잘 될 것 같다고 적어가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꼼꼼히 검토한 게 맞느냐 하는 얘길 들을 수도 있다.

그런 CEO 반응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어떤 부서장의 경우 다른 사람(대개는 해당 부서의 하급자)에게 보고를 미루는 경우가 있다.

해당 부서장은 보고 준비의 오너(owner)이고 보고서의 내용에 자신의 의견을 대부분 반영시키지만 정작 CEO 앞에서는 앞장서서 의견을 내지 않는다. 보고자의 발표를 듣는 중에 CEO의 반응을 살펴가면서 자신의 스탠스를 정하는 것이다.


회의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고 CEO가 보고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으면 보고자의 발표에 첨언해서 설명하며 자신의 의견이었음을 강조하고, 보고자가 CEO의 챌린지를 당하면 바로 CEO의 편에 서서 함께 보고자 발표의 부족한 부분을 질책한다.


이런 방법은 보고서의 내용 자체만 봤을 때는 부실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고자의 존재를 단순히 소모품 정도로 활용해 진짜 책임자의 안위를 도모하는 안전장치 정도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보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는 내가 직접 CEO에게 보고를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보고자를 관찰했을 때의 경험으로 판단했을 때, 부실한 보고가 생기는 원인과 책임이 온전하게 보고하는 측에 있다고 생각했다.

보고자의 실력이나 정직성이 보고의 내용에 반영되고 그 결과로써 보고의 질이 결정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보고의 주체가 되어 CEO에게 보고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부실한 보고의 이면(裏面)에는 보고자가 아닌 다른 이유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보고 받는 사람의 실력이나 감춰진 의도 역시 부실한 보고를 만들어내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떤 보고는 누가 봐도 부정확한 근거로 명백히 부실한 내용과 심지어 거짓된 내용이 보고되는데도 문제없이 마무리되는 경우가 있었다.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정직하게 보고가 되는데도, 내용과 상관없는 다른 꼬투리가 잡혀서 보고 자체가 문제시(問題視)되고 심한 질책을 받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


물론 "보고"라는 절차는 철저하게 "보고를 받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가 갈 수 있게 정리되어 전달돼야 하므로 혹시 CEO가 보고 내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커뮤니케이션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건 보고자의 잘못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고의 내용에 대한 이해나 평가와 관계없이 CEO가 이미 특정 사안에 대하여, 묵시적 의도나 결론을 갖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도 보고자 측에 일방적인 책임을 미루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상사의 묵시적 의도를 탐색해서 그 방향에 맞춰 보고서를 쓰게 만들어진다면, 그런 행동은 알아서 기라는 손타쿠(촌탁, 忖度)를 강요하는 모습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엄연히 사실과 상식이라는 게 있는데도 그런 부분을 애써 무시하고 CEO가 감춰놓은 의도를 찾는 것에 익숙한 조직이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개인의 무탈한 보고를 위해 사실을 보려 하지 않고 정직하게 사고하기를 멈추게 된다. 사람들이 무사유(Thoughtless)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충분히 경험해보았다.


기업 안에서 CEO에게 전달하는 보고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판단을 구하는 과정이다.

그 중요성이야 아무리 강조해 말해도 모자랄 정도로 당연한 일이다.

그 중요한 과정이 이뤄지는 동안 보고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가리고, CEO는 자신의 의도를 숨긴다면 그런 관계 속에서 제대로 된 보고의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무슨 다른 목적을 가진 이면계약(裏面契約)도 아닌 다음에야 사전(辭典)에도 없는 이면보고(裏面報告)라는 건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이, 그저 사실과 상식에 근거해서 정직하게 소통하는 게 당연하고 정상적이길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직(閑職)에 대한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