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니 친구가 나를 붙잡고 빨리 나가자고 애원을 하고 있었다.
2020년 5월 한창 코세글자가 주변을 온통 덮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마스크를 끼고 만화카페에 갔던 날이 있다. 만화도 그렇게 즐겨보지 않았지만, 친구를 따라 간 길에 이것저것 책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던 내 눈에 들어온 만화책이 있다.
이름하여,, 식물생활이라는 만화책이다. 어쩌다 이 책을 홀린 듯 가져와 앉아 읽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가 나를 붙잡고 빨리 나가자고 애원을 하고 있었다. ‘덕통사고’를 당한 날이었다.
그날 어찌 친구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정말이지 나는 만화책 속에 나오는 식물들에 폭 빠져버렸다. 저마다의 기르는 방법이며, 잎사귀의 폭과 모양에, 정신이 나갔고.. 집에 오는 길에 다음날 갈 수 있는, 우리 집과 가까운 식물가게를 찾아보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지도 앱을 뒤적거렸다.
불행하게도 그다음 날은 일요일이었고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10분을 걸어, 버스를 타고 또 10분을 걸어야 하는 옥길동에 위치한 한 식물 가게를 찾아냈다.
왠지 모르게 정말 정말 예쁘게 입고 가고 싶어서, 사놓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보라색 노란색 잔꽃무늬가 가득한 슬립 원피스를 입었다. 거기에 또각구두를 신고 버스에 올랐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 따땃한 햇볕이 한 곳에 가만히 고이는 5월 오전 어드매 즈음.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노란 원피스를 입은 23살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꽃집에 향했다.
아직도 그 식물 가게를 잊지 못한다. 옥길동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던 남국의 파초. 이름이 너무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
가게 안에 들어가니 사장님이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아래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고 계셨다. 손님이 왔는지 모르시는 눈치였다. 나는 그냥 인사를 하지 않고 가게를 둘러봤다. 문에서 카운터까지 들어오는 몇 발자국 되지 않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식물들이었다. 왼쪽 벽장에는 토분이 잔뜩 쌓여있었고, 오른쪽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는 커다란 선반들 위에, 올망졸망 작고 귀여운 화분들이 쪼르르ㅡ. 놓여있었다.
사장님이 날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 나는 얼어었다가ㅡ 정신을 차리고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고, 사장님은 나에게 찾으시는 식물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래서 나는 ‘앗 아니요, 식물을 사려고 왔는데 딱히 찾고 있는 건 없고, 일단 구경하려고요…“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웃으시면서 ’아 그럼 천천히 구경해 보세요. 궁금한 것 있으시면 편하게 물어보시고요-’라고 말씀하셨다.
가게를 쭉 둘러보는데, 생각보다 식물을 고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금방 느꼈다. 문제는 화분 앞에 가격표가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당시 나는 학생신분이었던 지라 돈이 정말 정말 없었다. 아마 가게에 갈 때도, 2만 원 정도만 들고 갔었다.(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런데 식물가게에서 파는 식물들은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도매에서 사장님이 사 오신 뒤> 토분에 분갈이까지 해놓으셨던 식물들이었으니.. 서울이었으면 훨씬 더 비쌌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내가 아는 식물 가격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식목일마다 부모님과 함께 갔던 산 아래 비닐하우스 농원에서 봤던 플라스틱 포트분들이었고.. 당연히 천 원 이천 원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가격은 고사하더라도, 내가 죽이지 않고 키울 수 있는 식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식물은 많았지만, 곧 죽을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열정보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전의를 상실한 나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사장님을 불렀다.
“혹시, 잘 안 죽는 식물이 뭐예요?”
사장님은 내 말에 생각에 잠기시더니, 햇볕이 드는 창 쪽 선반을 보여주셨다. 잘 안 죽는 애들이요?
그러면서 하나씩 설명을 해주셨다(사실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얘는 이래서 예쁘고 이래서 귀엽고,, 웬만해선 잘 안 죽어요.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여쭤봤다. “그러면.. 이 중에서 제일 안 죽는 식물이 뭐예요?” 그러자 사장님은 나를 잠시 쳐다보시더니. “제일 안 죽는 식물이요? 웬만하면 잘 키우실 텐데… 음..”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카운터 아래에 있는 식물을 가리켰다.
“얘요. 얘는 정말 안 죽을 거예요. 물론 관심을 아예 안 주면 죽겠지만”
둥근 호선을 그리며 위로 삐쭉 뻗은 두 개의 잎사귀를 가진 은빛 식물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예쁜 토분에 담겨있었고, 하나는 플라스틱 포트에 담겨있었다. 나는 좀 더 저렴한 플라스틱 포트에 담긴 식물을 골랐다.
사장님은 이리저리 걱정 어린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상냥하게 천천히 설명해 주시면서 식물 이름표를 예쁘게 인쇄해 주시고, 마끈으로 플라스틱 포트 테두리를 둘러 리본을 묶어주셨다.
귀엽고 투박한 작은 생명이 검은 봉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내 손에 들어왔다. 그렇게 내 식물생활이 시작됐다.
(식물이름이 뭘까요,, 맞춰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