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터 맥도널드의 <만들어진 진실>
아래 두 문장을 비교해보자.
'인터넷 덕분에 전 세계 지식을 폭넓게 접할 수 있다.'
'인터넷 때문에 잘못된 정보와 증오의 메시지가 더 빨리 확산된다.'
두 문장 모두 진실이다. 하지만 어떤 진실을 취하느냐에 따라 관점은 달라진다.
이번엔 책에서 소개하는 '퀴노아 딜레마'를 보자. (pp.14~20)
"채식주의자나 만성 소화 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 퀴노아의 발견은 기적과도 같았다. 퀴노아는 글루텐이 없는 씨앗 식품이다. 철분과 마그네슘이 풍부하고, 우리 몸이 자체 합성할 수 없는 온갖 필수 아미노산 등 그 어느 곡물보다 많은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퀴노아를 가장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식품이자 우주 비행사들을 위한 이상적인 식량으로 평가했다. … 급기야 이 '슈퍼 푸드'는 국제연합(UN)에서까지 인정을 받아 2013년은 '세계 퀴노아의 해'로 지정됐다. …
그러나 퀴노아 팬들에게는 난감한 폭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2006년에서 2013년 사이 볼리비아와 페루(생산국)에서 퀴노아 가격은 세 배로 급등했다. 처음에는 이 가격 상승이 축하할 일이었다. 안데스 산지 가난한 농부들의 생활수준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 2011년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볼리비아에서 지난 5년간 퀴노아 소비가 34퍼센트나 급감했다고 우려했다. 이 지역의 주식(主食)이 이제는 지역 주민들이 더 이상 구매할 수 없는 사치품이 돼버렸다는 전언이었다. 2013년 영국의 <가디언(The Gaurdian)>은 "채식주의자들은 퀴노아에 관한 불편한 진실은 잘도 삼키는가?"라는 표제로 논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 …
국제적인 수요 증가로 인한 퀴노아 가격 급등이 볼리비아나 페루의 지역 주민들을 오히려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은 그럴싸했고 광범위하게 팩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경제학자 마크 벨마, 세스 기터, 요하나 파야르도 곤잘레스의 눈에는 이게 옳은 주장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퀴노아 교육 덕분에 이제 수많은 해외 자본이 볼리비아나 페루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그 자본의 많은 부분은 남아메리카 최빈곤 지역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
세 경제학자는 페루 가정의 소비 지출에 관한 설문 조사 데이터를 찾아내 가구들을 셋으로 구분했다. 퀴노아를 재배하고 식용하는 가구, 퀴노아를 재배하지 않고 식용만 하는 가구, 퀴노아를 접해본 적이 없는 가구가 그것이었다. 이들이 발견한 내용에 따르면 2004년에서 2013년 사이 세 집단의 생활수준은 모두 높아졌고, 그중에서도 퀴노아 재배 농가의 소비 지출이 가장 빠르게 늘었다. 농부들은 부유해졌고, 그들이 새로 생긴 수입을 지출함으로써 주변 가구들에까지 혜택이 돌아갔다. … 게다가 페루 가구의 소비 지출 중에 퀴노아에 쓰는 돈은 겨우 0.5퍼센트 남짓에 불과했다. 애당초 퀴노아는 페루 가정의 예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해피 엔딩이지요. 제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득이 되고 있으니까요." 기터의 말이다. …
싱크탱크 조직은 푸드 퍼스트(Food First)의 타냐 커슨은 안데스 지역 퀴노아 농부들이 "솔직히 퀴노아에 물려서 다른 식품을 구매하는 것"이라고 했다. 볼리비아의 농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0년 전 그들은 안데스에서 나는 음식밖에 먹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는 선택이 가능하고, 이들은 쌀, 면, 사탕, 콜라, 그 외 온갖 것들을 다 먹고 싶어 합니다!" …
음식의 유행과 국제 교역, 소비자의 고뇌를 둘러싼 이 기묘한 이야기는 언뜻 들으면 마치 잘못 알려진 팩트를 바로잡은 사례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이야기의 전반부에 나온 주장들은 이야기의 후반부만큼이나 진실이다. 퀴노아의 가격은 실제로 세 배 급등했고, 페루나 볼리비아 소비자들은 주식(主食)인 퀴노아 구매에 더 큰돈을 써야 한다. 이들 국가에서 퀴노아 소비가 감소한 것도 사실이다. 진실이 아닌 것은 이런 팩트로부터 끌어낸 결론이다. 서양의 건강식 소비자가 페루나 볼리비아 사람들의 전통 식품을 빼앗아감으로써 가난한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결론 말이다. …"
이 두 충돌하는 진실(책에서는 경합하는 진실로 소개하고 있다)은 먼 나라 얘기 같지만, 우리나라에는 더 첨예한 갈등을 빚는 진실이 있다.
다소 민감한 문제다. 얼마 전 故백선엽 장군이 별세한 뒤 현충원으로 故백선엽 장군을 이장하느냐, 마느냐로 시끌한 적이 있었다. 본론은 현충원 이장 자체가 아니라 故백선엽 장군이 친일 반역행위를 했느냐, 아니면 구국의 공적이 있는 영웅이냐에 대한 내용이다.
서울신문에서는 이런 기사가 났다. "故백선엽, 전쟁영웅 그 이상", ""백선엽 장군 존경합니다", 펜스 미 부통령 백선엽 유족에 서한".
반면, 한겨레에서는 이런 기사가 났다. "백선엽 부대가 우리 가족을 죽였다-경북 상주 피해자위원회", 그리고 고발뉴스에서도 "백선엽, 日서 '간도 특설대 강연, 영웅대접 … 기록 다 있다."라는 기사가 났다.
진실은 무엇일까?
헥터 맥도널드가 주지한 바와 같이, 둘 다 진실이다. 실제로 백선엽 장군은 생전 간도 특설대 복무를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국가 위기의 순간에 헌신한 것도 증명된 사실이다.
팩트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팩트에 기반한 관점이다.
책에서는 이를 확증편향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도, 마케팅이라면 입맛에 맞추는 영민함이라고 에둘러 말하기도 한다.
책에 소개된 '옛날이야기 속 시각장애인'을 보자. (pp.50~51)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처럼 생겼다고 하네요.
코끼리 꼬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로프처럼 생겼다고 하네요.
코끼리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나뭇가지처럼 생겼다고 하네요.
코끼리 옆구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벽처럼 생겼다고 하네요.
코끼리 상아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파이프처럼 생겼다고 하네요.
코끼리 귀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부채처럼 생겼다고 하네요.
현실이라는 표본 수집 과정에서 무엇을 포함시키는지는 어떻게 정해질까? 무의식 중 나의 관심사나 타고난 편향에 따라 고를 수도 있고, 아니면 뭐가 되었든 지금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의미 있거나 내 사고방식에 맞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기존의 내 세계관과 충돌하는 생각 또는 데이터는 버리거나 무시할 수도 있다. 혹은 의도적으로 현실 중에서 내가 추구하는 방법과 맞는 측면만 골라서 수집할 수도 있다."
그 밖에도 모든 사건에 대해서 경합하는 진실을 찾아볼 수 있다. 난민 문제, 코로나 검진 문제, 입시 문제 등. 책에서 주로 강조하는 것은 앞에 소개한 내용이 골자를 이룬다. 다만, '퀴노아 사건' 외에도 '프로파간다와 스핀 닥터', '환타와 나치', '카트리나 허리케인', '아일랜드 GDP',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수에즈 위기' 등 정치, 경제, 역사, 문화를 아우르는 방대한 범위의 경합하는 진실을 다루고 있다.
언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몸을 담았다 뺐다 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팩트보다는 관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갈증, 또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헥터 맥도널드를 만나 일종의 해갈이 됐다는 생각을 한다.
몇 년 전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에서도 이런 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를테면 CNN의 슬로건은 '여러분께 사실을 제공합니다'이다. 네덜란드의 NRC 한델스블라트는 '의견이 아닌, 사실을 전달하는'자신들의 능력을 줄기차게 홍보한다. BBC는 자기네가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고 큰소리친다. 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pp. 33~34)
그마저도 요즘엔 미덥지 않다. 어느샌가 언론 매체들을 바라볼 때면 진영논리를 펼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제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은 우익, 한겨레는 좌익'이라는 말 말이다. 소설가 김훈도 최근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공정성을 담보한 팩트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또, 팩트를 어느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책에서는 그저 팩트는 '만들어진 진실'일 뿐이며, 어디에나 경합하는 진실이 있다고 말한다. 김 빠지기도 하지만, 또 맞는 말이다. 팩트를 넘어서, 관점으로 바라볼 때다.
그밖에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몇 문장을 추렸다.
-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기다. 그래서 모든 살인은 처벌을 받는다. 많이 죽여 나팔 소리를 울렸을 때는 예외다. (p. 181)
- 유명 평론가 케이티 홉킨스는 심지어 <선(Sun)> 신문의 선동적 기사에서 이민자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했다. (pp. 226~227)
-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Sapiens)>를 보면 … 도발적이게도 신석기시대의 농업 혁명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기"라고 부른다. 농사가 "일반적으로 채집가에 비해 농부의 삶을 더 힘들고 덜 만족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농부들이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면서 먹는 것은 훨씬 형편없었다고 주장한다. … 인간의 몸과 마음은 사냥꾼과 채집가로 사는 게 더 체질에 맞았다. 우리는 나무를 오르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무언가를 쫓아가고 새로운 걸 발견하게 만들어졌다. (p. 212)
(갤럽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 세계 노동 인구 중 13퍼센트만이 '일에 몰두한다'라고 한다. 나머지 24퍼센트는 '적극적으로 딴청을 피웠다', 63퍼센트는 '일에 동기가 부족하고 자발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인류가 치러야 하는 심리적·경제적 비용은 얼마나 막대한가?)
- 지금은 실패가 바람직하다는 이 새로운 진실이 곳곳에서 힘을 얻고 있다. … 이런 흐름을 두고 BP의 최고 경영자를 지낸 존 브라운은 어떤 기업에게는 "실패가 거의 성공과 맞먹는 모양"이라고 빈정댔다. (p. 212)
메인 커버, ⓒ jobsN, 이제석의 광고 "한 해 대기오염으로 6만 명이 사망합니다.", NRDC 국제 환경단체 옥외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