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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Aug 17. 2020

삶이 보잘것없는 역할만을 맡기는 한 할 수 없었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다.

부담 없는 서사와 어떻게 보면 단출한 등장인물들이 그만큼 간단한 읽기를 주선한다.

그러나 감상이 그만큼 가볍지는 않다. 



<새의 선물> 세 줄 요약

1. 웃기다가 슬퍼진다.

2. 세련된 필치가 주는 독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3. 역시 남 연애 얘기가 제일 재밌다.



작가는 작품 속 화자를 12살의 소녀로 설정했는데,

어른들의 세계를 12살의 소녀 시선에서 그리면서도 소녀가 정신적으로 조숙한 설정이다.

그런데 가끔 결국은 나이를 이기지 못하는 조숙함때문에 울기도 하는 평범한 모습도 보인다.


줄거리는.. 생략하고

기억에 남는 부분만 쓰고 싶다.



(1)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 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 씨를 통해서 알아냈다."

 소설이 극적인 서사로 휘몰아치기 전쯤에 나오는 부분이다. 소설에서 이 문장이 나오게 된 계기는 물론 주인공의 이모와 이형렬의 사랑을 관전하며 보는 통찰, 그리고 주인공과 허석의 사랑(주인공의 일방적인 짝사랑인 것 같지만)에서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감상이지만, 문장 자체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게 한다.

 오히려 반대 아닌가? 내 주변에는 삶에 냉소적인 사람이 오히려 불성실하고, 삶에 집착하는 사람이 뭐라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사실 박광진도 주변 사람이 보기에는 불성실하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아닌가.


(2)

"물론 순간적인 느낌일 뿐일 것이다. 아무리 실연의 상심이 컸다한들 이모는 이모이고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는 없다. 내가 유의한 것은 이모가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모의 내면에는 수많은 다른 모습들이 함께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들 중에 하나씩을 골라서 꺼내 쓰는 제어장치, 즉 이모의 인생을 편집하는 장치가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면 이모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우리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열두 살 아이의 어렴풋한 관찰 치고는 꽤 정교하다. 평소 이모란 사람을 항상 천방지축에 가볍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여기서는 이모에 대한 자기의 고정관념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도 딱히 해답은 없이 질문에 그친다. 사실 명쾌한 해답이 필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사람들도 다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내 안의 많은 모습 중에 내가 원하는 모습들에 집중하면서 그 모습들만 성장시키려고 하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도 종종 튀어나온다. 아니 어쩔 때는 그 모습으로만 살아가는 날도 있다. 

 내 모습이 내 안의 많은 나를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제어 장치로 통제가 가능하다면 내가 정말 원하는 내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3)

"뜨거운 눈물을 보이고 사라진 검은 산 홍기웅은 결국 어젯밤 깡패 이외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이 그렇게 보잘것없는 역할만을 맡기는 한 할 수 없었다."

 홍기웅에게 처음으로 동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전까지도 이모에 대한 나름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던 사내의 얼치기 같은 모습에 동정표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 대목에서 느낀 동정은 진실했다. 만약 소설 속 주인공이 홍기웅이었다면 12살짜리 꼬마애의 이야기보다 더 극적인 서사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홍기웅은 그러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 동네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수 없는 배경과 현실에 처해 있었다. 홍기웅은 소설 속 등장인물 누구나처럼 현실에 꼬리를 말고 그냥 뒤켠으로 밀려난 것이다. 

 나중에 트럭을 몰다가 이모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그동안의 시간들이 마치 내 얘기인 것처럼 스쳐 지나가며 가슴 아픈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홍기웅이 그렇게 허석을 죽일 듯이 팼던 건 아마 이모의 순결을 가져갔던 순간을 목격하거나, 허석의 진실되지 않음을 미리 꿰보았던 홍기웅의 마지막 저항이었을지도 모른다.


(4)

"어느 날 나는 지나간 일기장에서 '내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긴 목록을 발견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다 말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면체로서 언제나 흘러가고 또 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삶 속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이며 또 믿음을 당연하고도 어이없게 배반당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입을 것인가. 무엇인가를 믿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그 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삶을 꽤 심각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목록을 다 지워버렸다."

 초등학교 5학년이 쓰기에는 너무 진지한 통찰, 너무 진지한 일기다. 주인공도 일 년이 지난 시점에 시인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어른인 척하기 위한, 또는 자신이 조숙하다고 믿고 싶은 믿음에서 오는 또 다른 위선이다. 주인공도 사실 자기 자신이 처한 부모님 없는 현실, 상처로 부터 면역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현실 때문에 조숙한 역할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나도 꽤 진지하다. 나도 저런 짓을 가끔 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들을 다 어린 날의 치기나 술 취한 주정으로 치부하고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지워진 일기나 블로그, 인스타그램 속 파편들을 보며 그땐 그랬지 하고 추억을 씹는다. 그런 짓들의 성숙함 미숙함을 떠나서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평생 그 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



쓰다 보니 너무 진지한 부분만 뽑았다.

사실 나는 읽으면서 깔깔 웃으며 읽은 게 더 많다. 그리고 경자 이모와의 이별 부분에서는 눈물도 흘렸다. 은희경의 예리한 필치과 시선에 감탄한다. 최근 은희경 작품은 더 예리한 통찰과 시선을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 위트까지 더하면서 품격을 살려준다.


이외에 많은 감상이 있지만, 지면의 부족(귀차니즘)으로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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