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희롱 피해 경험
불과 2년 전 일이다.
전 직장으로 막 이직했을 때, 옆 부서에 나와 일주일차로 입사한 경력직 차장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그 회사 분위기 자체가 배타적이고 방어적이라서 기존 직원들은 나와 그 차장을 별로 반기지 않았었고, 나는 그나마 나에게 호의적이고 같은 입사 시기로 인해 묶여 다녔던 그 차장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차장은 나와는 10살 차이가 났고 유부남이었다. 어린 아들도 있었다. 지방 출신이었는데 일자리가 없어서 가족을 지방에 남겨두고 혼자만 서울에 올라와 일하고 있었다. 그는 식품업계의 경력이 많았고 인맥도 넓은 편이었다. 나는 그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내 향후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나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냥 일에 열정적인 40대 차장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유부남인 데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기 때문에, 또래 이성 동료에게서 이따금씩 느낄 수 있던 불편한 긴장감도 없었다. 한 마디로 그에 대해 경계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그가 회식을 마치고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 전까진 말이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차장과 함께 팀장님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회식도 일찍 끝났으나 내가 회사와 집까지의 거리가 멀고 지하철을 2번이나 환승해야 되는 것 때문에 귀찮아하자 그가 먼저 목적지가 비슷하니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때 그의 차를 얻어 타고 집까지 가는 길 내내 일에 대해서 말했다. 신규입사자들끼리 이 회사에 느끼는 생각도 공유했고, 앞으로 일을 더 잘하려면 어떤 소양이 필요한 지에 대해 얘기했다. 건설적인 토론이었고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덕분에 편하게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몇 주 후 회식이 하나 더 잡혔다. 이제 팀장님 없이 직원 몇몇끼리 하는 간이 회식이었다. 오래 일한 과장 하나가 우리 둘의 적응을 위해 주최한 자리였다. 그날 그 차장은 팀장이 없어서 그런가 그전보단 훨씬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내 외모를 별안간 칭찬하기도 하다가, 본인이 사실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밝혔다. 그리고 본인은 서울에서 오피스와이프를 매번 만들어 왔었다고도 했다. 충격적인 발언에 나와 다른 직원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그것이 그의 짓궂은 농담 정도일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리고 곧 자리를 파하고 그가 저번처럼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왠지 조금 망설여졌지만 막차가 곧 끊길 시간이었고, 이미 한 번 그의 차를 얻어 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그는 나에게 차 안에서도 계속 본인의 과거 오피스와이프 썰을 풀어댔다. 이런 얘길 왜 자꾸 나한테 하는지 의아했다. 도저히 옳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과, 그냥 상사의 실없는 농담에 대충 맞춰주자는 마음 사이에서 자아가 충돌했다. 그러나 일단은 내가 그의 차를 얻어 타고 있고, 난 앞으로 회사생활에서 그와 척지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썰들이 진짜라도 그냥 지금은 최대한 그의 말을 실없는 농담취급하면서 가벼운 분위기로 화제를 돌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이... 차장님, 근데 그러다 들키시면 어떡해요.라고 하니까 그는 자신감에 차서 절대 들킬 일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다고... 속으로 그래서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 예... 대충 응대하고 대체 난 언제 내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이 차를 얻어 타면 진짜 미친년이라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 드디어 그가 주제를 바꿔서 내게 말했다. 수도권에 드라이브할만한 명소들이 많다. 본인이 혼자 취미로 드라이브를 많이 다닌다고 말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주제는 아까 주제에 비해 노말한 것 같았다. 아 그래요? 좋으시겠어요. 정말 1도 영혼 없지만 예의상 답변했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그가 그동안 던졌던 모든 주제들을 한 번에 엮는 한 마디를 던졌다. 쉬는 날 심심하면 연락해. 드라이브시켜줄게.
씨발. 그제야 이 새끼가 나한테 왜 계속되지도 않는 오피스와이프가 어쩌고 얘길 했는지 깨달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팔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무서워졌다. 바로 차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밖은 차만 쌩쌩 달리는 도로였다. 최대한 멀쩡한 척했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내릴 때까지 무슨 정신으로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멘털이 나갔다. 집으로 가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펑펑 울었다. 입사한 지 겨우 한 달도 채 안 됐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회사를 옮기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론 너무 싫으니까 오히려 현실부정을 하게 됐다.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그런 뜻으로 얘기하신 게 아닐 수도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까지의 대화는 명백한 게 없었다. 오피스와이프가 어쩌고 한 게 나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면 어떡하게. 드라이브 얘기? 그냥 아끼는 후배한테 호의를 베푼 거라고 하면 어떡하고. 게다가 증거도 없었다. 따로 녹음을 해둔 것도 아니고 내 기억력이 유일한 증거였다. 그리고 만약에 인정된다고 한들... 제일 믿을 수 없는 건 직장 내 다른 동료들이었다. 남자 직원들이 훨씬 많고 목소리도 훨씬 큰 사무실에서 더군다나 그 차장에 대한 신뢰도가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겨우 나 따위가 이런 것으로 컴플레인 걸어봤자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였다.
결국 일 크게 벌이지 말고 그 차장과 서서히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날, 내가 출근하자마자 그 차장은 나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어댔다. 내가 전날밤 고통 속에서 치열하게 고뇌할 때, 그 인간은 자신이 어제 나에게 한 번 선을 넘었는데 별 일이 없었으므로 더 선을 넘어도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최대한 답장을 안 하려고 했으나, 상사가 일 관련해서 질문하는 것을 씹을 순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일 관련된 질문에는 답변을 하면,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사적인 질문을 물어봤다. 애써 몇 개는 씹고 몇 개는 못 본 척하는데, 나보고 퇴근하고 또 집에 같이 가겠냐고 물어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친구랑 약속이 있다고 하자, 그는 본인도 나와 놀아줄 수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퇴근 후 그는 나에게 또 한 번 카톡을 보냈다. 어제 내게 말했던 그 드라이브 스폿에 혼자 드라이브를 왔다고 말이다.
그제야 난 그에게 느끼는 좆같은 감정에 대한 마지막 죄책감을 덜어놓을 수 있었다. 내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 엄마는 너무 티 내지 말고 천천히 거리를 두라고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다음 주 출근하자마자 그를 대하는 내 태도는 180도 바뀌어있었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그를 향한 혐오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러자 그도 그것을 느꼈는지 며칠 지나자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 거는 것을 중단하였다. 다행이라며 속으로 안도했지만 또 다른 좆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가 내 업무 건건이 태클을 걸기 시작한 것이었다.
옆자리 돼지가 먼저 시비 걸어서 말다툼이 난 사건에도 그는 보란 듯이 철저히 돼지 편을 들었고 내 대처가 미숙했다며 나를 정면 비판했다. 회의 시간에도 내 의견에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모두 반대했다. 말투도 매우 날카로웠고 마치 그런 의견을 입 밖에 낸 내가 생각이 없고 모자란 것처럼 말했다. 아, 그건 진짜 또 다른 종류의 좆같음이었다. 난 어떻게 되든 회사생활을 잘하고 일을 잘하는 게 목푠데 내가 지 메신저를 몇 번 씹었다는 이유로 저렇게 내 회사생활에 흠집을 내다니. 진짜 내가 지독한 똥을 밟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내가 또 기존 직원들 텃세에 밀려서 '억까'를 당하게 되고, 그 차장이 또 혼자 두들겨 맞는 나를 유일하게 실드 쳐 주면서 다시 화해(?)를 하게 됐다. 나도 정말 유일한 내 편이 그 차장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이러니했다. 그리고 그때는 그 차장도 막 노골적으로 들이대진 않아서 어느 정도 흐린 눈을 할 수 있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어떻게 한 번 그랬던 사람과 다시 잘 지낼 수 있냐고?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회사에선 정말 선과 악, 흑과 백으로 누군가를 손절하기엔 너무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역한 사람이라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굳이 척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치열한 전략이 무색하게도, 갑자기 그는 어느 날 퇴사를 하게 됐다. 적의 적이자 또 다른 나의 적이었던 사장 측근이 그 차장에게 배임 혐의를 씌운 것이었다. 구체적인 사실은 양쪽이 얘기하는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또한 기존 직원들 텃세에 '억까'당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사고 제대로 치기 전에 회사에서 싹을 뽑아버린 것인지 진실은 알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그가 회사에서 잘려 나가자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가장 크게 든 감정은 '다행'이라는 거였다. 이제 더는 억지로 대화 주제를 바꿔가면서 그에게 거슬리지 않게 그를 멀리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난 속으로 그가 잘린 것이 매우 기뻤고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로써 모두 끝날 줄 알았던 그와의 악연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