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내 잘못은 아니야
그는 회사에서 잘린 후, 나에게 거의 매일같이 연락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평소 그 사장 측근이 일도 못하고 싸가지도 없어서 한 마디 해줬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에게 복수한 것이란 요지였다. 나도 그 사장 측근이 평소에 얼마나 별로인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그 차장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도 했다. 분노에 찬 그 차장은 그 사장 측근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다. 나에게 그 사장 측근은 물론이고, 이 회사 출신 핵심인물들이 추후 이직의 시기가 왔을 때 자신의 모든 인맥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재취업을 막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 업계에 영향력이 있는 지와, 자신에게 화를 입힌 그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걸 계속 거듭해서 말했다.
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그가 매우 집요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물론 허풍과 과장일 수도 있지만 분노에 가득 차 복수를 꿈꾸는 그의 타깃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퇴사에 일조한 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가 많이 두려워졌다. 지금이야 그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해서 나에게 해코지하지 않았지만, 추후 내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면 나 또한 그 사장 측근과 같이 복수하려 들지 않을까. 이미 그전에 내가 그를 멀리했단 이유만으로 내 회사생활에 재를 뿌리려고 한 사례가 있었다. 내가 이제 회사에서 볼 일 없다고 한 번에 그를 모른척하면 또 나를 같은 편이네 뭐네 하면서 해하려 할 것 같았다.
그러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퇴사 후 사업을 시작했는데, 우리 집 근처에서 매일같이 볼 일이 있다며 밥을 먹자고 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매일 거기 가니까 네가 가능한 날을 찍어서 줘" 라는데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거절했다가 내가 사는 곳도 아는 그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무서운 것도 있었다. 그 당시 내 전략은 차라리 그를 만나서 밥만 먹고 그가 날 이성으로 보지 않게 은근슬쩍 선을 그으려고 했다. 그래서 결국 그를 만나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회사 얘기, 일 얘기만 했고 전 직장에 있었던 빌런들에 대한 얘기만 주구장창 했다. 처음엔 내 전략대로 일 얘기만 실컷 하고 끝나는가 싶었다.
그렇게 담백한 대화로 1차가 끝났는데 그가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둘러댔던 것 같은데 집도 가깝고 시간도 일러서 통하지 않고 어영부영 끌려갔던 것 같다. 나도 그때 내가 왜 제대로 거절하지 못했는지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 차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회사생활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했고, 모범생처럼 살아서 그런 거라며 일탈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너무도 알 것 같아서 최대한 그 얘기가 나오지 않게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다', '혼자 있는 게 좋다', '필요하면 내가 알아서 소개팅을 받겠다'라고 방어했다. 그런 내 말들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그는 가까이서 찾아보라는 식으로 말했다. 애초에 내 의사나 취향 따위를 듣고 포기할 인간이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부하직원이 당연히 제 '애인'이 될 거라는 확신을 하는 것부터가 상대방이 멀쩡한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일 테니까.
결국 불편하게 2차를 끝내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는데, 그는 계속 빙빙 돌려 찔러도 계속 못들 은척 하는 내가 답답했던 모양인지 결국 직접 카톡으로 묻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떠냐?
정말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솜털 하나하나까지 소름이 쫙 돋았지만 차라리 매번 역겹게 은유하는 것 말고 대놓고 물어보는 게 나았다. 못 들은 척하지 않고 대놓고 거절할 수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무서워서 최대한 그에게 가장 제너럴 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골랐다. 차장님, 유부남이시잖아요. 실은 유부남인걸 빼고라도 못생겼고 촌스럽고 나이도 너무 많아서 싫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러자 겨우 그런 이유 때문이냐며 내가 재미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날 이후 그가 실없이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찔러대다가 거의 처음으로 대놓고 말했는데 내가 거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련함과 동시에 남는 건 씁쓸함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에게서 업무 칭찬을 받았을 때 기뻤었다. 난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너무 역겹고 싫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내가 일을 잘한다고 말했던 것이 진짜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가 결국 내게 최후에 보여줬던 모습은 나를 단 한 번도 직장 동료로 존중했던 적이 없다는 것을 방증했다. 그는 늘 나를 그냥 이성, 여자애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자료를 잘 찾아도, 분석을 열심히 해도 말이다. 그 사실이 좀 슬펐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었다. 완벽히 무결한 피해자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를 처벌해 달라고 뒤늦게 이 사건을 경찰에게 신고했다고 치자. 그럼 경찰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차는 왜 탔어요? 그리고 카톡은 왜 이리도 친절한가요? 결국 밥도 먹고 술도 먹었네요? 피해자 맞나요? 사실은 기분 나쁘지 않았고 즐기고 있었던 거 아닌가요?
나 또한 나의 이런 단호하지 못한 행동들이 아쉬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들이 가해자의 잘못을 상쇄해 주거나 합리화해 주는 도구로 쓰일 순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나는 그와 회사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었다. 완벽히 남남이 아니고 내 직장생활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는 관계에서 나는 비록 성희롱 피해를 입었을지언정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를 신고하거나 거부할 수 없었다. 나에겐 그것과 별개로 회사생활도 매우 중요했고, 또 신고 후 보복 등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예전엔 위계관계에서의 성폭력 사건들을 볼 때, 가해자 측에서 종종 피해자와 웃으며 나눈 카톡 등을 증거로 제출할 때 그것이 가해 행위를 허락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한편 피해자가 왜 더 단호하지 못하고 이런 책잡힐 행동을 했는지가 아쉬웠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그 사건 안에서만 사는,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이지만 다음날이면 또 학교를 가야 하고, 회사를 가야 하고, 일도 잘해야 하고, 승진도 해야 하고, 퇴사 후엔 다시 좋은 직장도 구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때로 일관적이지 않고, 이중적이고, 사건 밖의 사람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도 그래서 그때의 나를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그 차를 타지 말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 모든 건 전적으로 그 나쁜 새끼의 탓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