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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Feb 06. 2024

소통의 어려움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것


BM으로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인 것 같다.


전에 MD를 하거나 영업을 하던 때에는 소통할 내용이 간단하고 명확했다. 이 상품을 소싱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공급가 얼마에 매입할 것인지, 제품 품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등... 매출 증대라는 한 가지 방향만 두고 늘 그것을 위한 말만 하면 되었기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크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BM은 영업과 지원 부서 사이에 중간 다리를 해야 하는 역할이다. 매출이 중요하다는 영업의 말도 일 리가 있고, 효율성을 말하는 생산이나 품질 의견도 늘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니 신제품 하나 진행하려고 하면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한쪽 편만 들면 당장 다른 쪽에서 반발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러니까 극히 미숙했을 때 명절 선물세트 기획을 하게 됐다. MD때처럼 잘 팔리는 것만 생각하고 영업과 뚝딱 협의해서 소비자가 좋아할 만한 선물세트를 생각해 냈다. 바로 이대로 제품화해 달라고 공지를 띄웠는데 다음날 여기저기서 항의메일과 전화가 쏟아졌다. 알고 보니 내가 요청한 선물박스가 생산에서는 이미 포장 효율 문제로 더 이상 취급하지 않기로 했던 규격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회사 사정 잘 모르는 초짜라는 게 감안되어 심한 말을 듣진 않았지만, 뭐든 자신감 있게 추진하곤 했던 내 기가 팍 꺾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나보다 최소 5년 이상 선배인 차, 부장님 급들이 그러시니까 뼈도 못 추리고 숙여야 했다.


한 번 그러고 나니 반대로 지원부서 눈치를 보느라 영업 요청을 받아주기가 어려워졌다. 아까 그 선물세트 사건의 연장선인데, 영업에서 원하는 선물세트 구성의 원가를 경영지원팀에 요청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높게 산정된 것이었다. 영업에서는 납득할 수 없어서 나에게 내용 확인을 요청했는데 돌아오는 경영지원팀의 피드백이 너무 방어적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리 산정한 것이니 월권행위 하지 말라는 뉘앙스. 그러나 한 번 현장 실무를 모르고 들이댔다가 생산에서 크게 혼난 적이 바로 직전이었기 때문에, 도무지 경영지원팀에게 원가를 다시 산정해 달라고 설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영업에 이 원가를 수정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다른 구성으로 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당연히 영업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했다.


나 또한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방어적인 대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담당하는 상품이었는데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원가를 1원이라도 더 조정해 보는 게 맞았을 거다.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머리로는 맞다고 생각해도 행동으로는 그게 쉽지 않다. 만일 딱 한 번이라면 얼굴 붉히는 일 있더라도 네가 틀렸고 내가 맞았다며 따질 수 있겠지만, 계속 오고 가며 얼굴 보고 목소리 들으며 일해야 하는 사이끼리 불편함을 만들어서 도움 되는 일이 없다. 내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한다 한들, 상대방의 표정에서 또는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감지되는 것을 무시하면서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요새는 메일 하나를 쓸 때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내가 요청하거나 공지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단명료하게 쓰기 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메일을 읽고 행동해야 할 누군가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하거나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메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수시로 전화해서 몇 번이고 설명하고 부탁을 드린다.


아마 위의 선물세트 사건도 내가 미리 전화라도 한 통 하거나 조금 더 부탁드리는 어조로 메일을 썼더라면 저렇게까지 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개 대리가 중간 과정 공유도 없이 냅다 이렇게 진행할 것이니 들어주세요라고 띄우니까 괘씸했을 수밖에.


가끔 솔직히 내부 직원들 비위 맞추기가 외부 영업하는 것보다 힘들어서 쪼들리고 현타올 때도 있다. 그래도 적당한 처세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이곳이 회사이고, 이 모든 것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어떤 제품을 진행해 달라고 요청을 받을 때, 그 제품의 제품화 과정에 따른 난이도보다도 요청자의 요청 방식에 따라 크게 마음이 달라질 때가 있다. 아주 간단한 요청이라도 그냥 자리로 와서 구두로 말하며 빨리 해달라고 재촉하는 것과, 좀 복잡한 요청이라도 메일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전달하고 빈말이라도 고맙다고 해주는 것은 크게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전자의 경우를 일부러 해주지 않거나 늦게 해 준 적은 없다. 그냥 성의 없는 요청은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작다는 것)


그렇기에 나는 요청받고 또 요청하는 BM으로서 앞으로도 늘 커뮤니케이션과 씨름할 예정이다. 대체 언제쯤 되어야 이 커뮤니케이션이 덜 부담스럽고 덜 두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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