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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눈이오름에 올라가 보세요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by 그럼에도

p.50

심술 사나운 돌풍이 짓궂게 장난을 걸어오면 억새는 더욱 신명 나게 춤을 춘다. 힘센 바람이 제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처음 모습 그대로이다. 아름드리나무들도 얼마 버티지 못해 뿌리째 뽑히고 크고 작은 나무들도 바람이 떠미는 방향으로 누워 있건만 억새는 끄덕도 않는다.


나는 그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은 멀리서 씨앗들을 한 움큼씩 가져와 내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떤다. 나는 그 바람을 품에 안고 사시사철 함께 중산간 초원을 떠돈다.


사철 억새와 함께 생활하는 나는 억새의 변화에 따라 기분도 변한다. 내 기분에 따라 정원의 분위기도 쉼 없이 변한다. 내 감정은 고여 있지 않고 주변 분위기에 따라 흐른다.


중산간 초원 억새의 아름다움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떤 이는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억새를 사랑하고, 어떤 이는 구름 짙게 가라앉은 날 아침이나 저녁, 여명에 드러나는 억새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바람 부는 날 너울너울 춤을 추는 억새를 으뜸으로 꼽는다. 어떤 빛에서 사물을 보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물이 놓인 주변 환경에 따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확연히 다르다.

김영갑.png 김영갑 작가의 사진 中

+ (중략)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용눈이.png 용눈이오름

p. 89

바람 없는 맑은 날 바라본 바다와, 맑고 파도가 거친 날 바라보는 바다가 똑같을 수는 없다. 물때에 따라서도 바다의 느낌이 달라진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바다를 보아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할 것 같은 평범한 풍경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풍경을 떠올리고 그 순간을 기다리다 보면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


'효리네 민박' 프로그램을 보던 어느 날, 순간적으로 제주도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고 금요일 퇴근과 함께 제주도행 비행기로 2박 3일 혼자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은 여행을 하는 기간 보다, 떠나기 전 설렘이 더 크다고 하던가? 도서관에서 봤던 제주 여행 관련 책에는 '게스트하우스' 추천이 보였다. 처음으로 게하에 도전해 보았다.

슬로우.png 게하 슬로우트립, 다락방(서재, 공동 공간)

예약한 곳은 바로! 다락방이 예쁘고, 조용한 장소였다. 유행과 내 취향을 동시에 반영한 장소였다. 빙하처럼 무거운 마음이 왠지 저 아늑한 다락방에서 다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번 아웃된 영혼과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슬로우트립에 도착했다. 동네도, 숙소도 고요함 그 자체였다. 정갈한 침실과 그 날의 여행객은 신기하게도 모두 여자분들이었다. 이 집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고요함을 깨고, 낯선 여자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나는 2인실을 예약했었다.


처음 본 사람끼리의 그 어색함이란... 어색한 침묵을 깬 건, 30대 초반으로 보였던 룸메이트였다. 처음 본 사람에게 왈칵 눈물이 나듯, 그때 나의 복잡한 마음을 홀린 듯이 말해 버렸다. 그리고 나의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에 조용히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가보세요.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서 찍은 사진이 있고, 그 사진을 보고 나서, 용눈이오름에 올라가 보세요.


밑도 끝도 없는 둘의 대화가 끝나고, 잠들었다. 불면증이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꿀잠을 잤다. 룸메이트는 1박 후 아침에 우도에 있는 북카페에 간다고 했다.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서, 배를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김영갑 갤러리로 향했다.

두모악.jpg 두모악 입구에서 나를 반겨주던 하르방

작고,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친 이야기를 보고, 읽고 나왔다. 그렇게 향한 용눈이오름!


용눈이오름에 오르고 알았다. 왜 여길 가라고 알려주었는지를!


사방이 확 트인 오름 정상에서는 햇살도, 바람도, 억새도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고여있던 고민과 우울함 같은 잡다한 감정도 바람에 날려버리는 것 같았다. 앉아서 한참 동안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도, 전화번호도 서로 묻지 않았던 룸메이트가 생각나는 밤이다. 그리고 김영갑 작가가 아끼던 용눈이오름에 앉아서 다시 하늘을 보고 싶다.



사진 http://www.hani.co.kr/arti/PRINT/247189.html

https://blog.daum.net/0262610800/17503972

https://hermoney.tistory.com/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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