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울지 말고 꽃을 보라'
p. 163
바람을 미워하는 한 은행나무가 있었다. 원래 바람과 나무는 친한 사이였으나, 이 어린 은행나무는 바람이라면 얼굴부터 잔뜩 찡그렸다.
+ (중략)
어? 곧 겨울인데, 왜 나만 낙엽이 지지 않는 거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는 몸을 마구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잎과 열매가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곧 겨울이 찾아왔다. 다른 은행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으나, 그는 여전히 온몸에 잎과 열매를 그대로 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 쑤군거렸다. 그러자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신문에 내걸었으며,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그를 찍어 뉴스 시간에 '낙엽이 지지 않는 은행나무'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일약 유명한 은행나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러 몰려왔다. 그는 우쭐해졌다. 자신이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런 그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라고 말을 붙여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 (중략)
그날 밤, 그는 문득 잎과 열매를 떨구지 못하면 봄을 맞이할 수 없게 되고, 봄을 맞이할 수 없게 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맞아, 그래서 친구들이 날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 거야. 도대체 이 일을 어떡하면 좋지?'
그는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급해진 마음에 그토록 미워했던 바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안하다, 바람아. 날 용서해 줘. 이제 날 용서해 주고, 내 잎과 열매를 좀 떨어뜨려 줘. 응?
그날따라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지만, 그는 새벽이 지나도록 간절히 그런 부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온몸에 썰렁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 보니 그의 잎과 열매가 땅에 다 떨어져 있었다.
"축하해. 우린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친구들이 서로 가지를 뻗어 그를 축하해 주었다. 그는 눈물이 핑 돌았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은 널 강하게 하기 위해서야.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넌 뿌리가 약해 어쩌면 금방 쓰러지고 말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바람이 강하게 자꾸 불어오니까 넌 쓰러지지 않으려고 깊게 깊게 뿌리를 내린 거야. 그게 다 바람이 널 위해서 한 일이야. 사실 우린 바람에게 감사해야 돼. 바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성숙한 어른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이 책은 어른 동화다. 어른이 읽는 동화란 묵직한 메시지는 마음으로 느껴지고, 글의 길이는 짤막하다. 작은 풍경화 그림이 떠오르는 글에서 어떠한 울림이 느껴졌다.
잎과 열매를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긴 나무. 지금 밖에 서있는 가로수들의 모습이다. 지금은 2월, 다가올 봄을 향해서 나뭇가지를 단단히 내리고, 새로움을 맞이할 준비를 기다리고 있는 미니멀리스트.
쌀쌀한 바람 사이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