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주말의 재미(벚꽃엔딩과 떡볶이)

김정운, '노는 만큼 성공한다'

by 그럼에도

p. 193

한국에서 영화가 유난히 잘되는 이유는 이 땅에 자기가 정말 재미있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영화는 2시간의 짧은 순간에 모든 재미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주어지는 정보만 성실하게 수용하면 된다. 내가 앞서서 고민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아주 수동적인 편안함만 유지하면 된다. 내가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영화처럼 마음 편한 오락거리는 없다.


한국 영화가 잘되는 것은 한국 연속극이 잘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합창계의 원로 지휘자인 윤학원 선생이 한국에서 음악회가 안 되는 이유는 다 TV 연속극 때문이라고 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이다. 독일의 TV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TV 프로그램은 너무 재미있다. 귀국해서 정말 온종일 TV만 봤다.


+ 중략


새소리만 들어도 재미있고 나무만 봐도 재미있다면 세상에는 정말 재미있는 것 투성이다. 놀이 공원도 없었고 골프도 없었던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사소한 재미로 인생의 즐거움을 삼았다. 어느 동네에 매화가 예쁘게 폈다 하면 며칠을 걸어 찾아가 그 꽃을 바라보는 재미로 살았다. 글씨 쓰는 재미로도 살았다. 참 사소하게 즐겼던 것이다.


+ 중략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런 사소한 재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재미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재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미는 엄청나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과 같은 환희를 느껴야 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정말 못 노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휴가를 가서도 무슨 엄청난 재미가 없는가 하고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은 폭탄주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 뒤집어지는 재미가 없으니 차라리 폭탄주나 마시고 자기 위장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놀이공원식의 재미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웬만해선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요즘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는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보낸다. 그런데 그 재미에도 적응이 되면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죽기 직전까지 보내주는 놀이기구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이젠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은 마약과 같은 약물이다. 놀이기구에서 느끼는 재미란 말초 신경을 자극해도 더 이상 흥분시키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면 남은 것은 이 호르몬을 직접 주사하는 것뿐이다. 재미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의 종착역은 마약이다. 재미에 대한 환상은 할리우드식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집단적인 마약 중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수록 자극적인 재미를 찾는 것이다.



어묵 밑으로 잠수한 떡, 떡볶이?!

토요일 오후는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다. 경찰서에 처음 가보고, 조사 당사자는 아니지만 형사를 보러 동생이 간다는 소식으로 며칠 전부터 심장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가기 전, 우리의 이런 놀란 마음을 달래줄 떡볶이를 만들었다. 냉동실에 고이 모셔둔 떡국용 떡과 마트에서 사 온 고급 어묵을 아낌없이 넣고~박막례 할머니 떡볶이 레시피에 고춧가루를 더 넣고 만들었다.


화가 난 마음엔 떡볶이와 드립 한 원두커피에 얼음을 동동 띄워서 한 잔 마시고 경찰서로 향했다. 화려한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경찰서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보니, 90년대 드라마 배경으로 쓸 법한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구조와 책상이 있었다. 건물 내부의 분위기만으로도 압도되는 마음. 당사자가 아니라 조사받는 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건물 1층에서 동생을 기다렸다.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거부감에 '합의금'을 줄까도 했었다. 그런데 인터넷 올린 글과 더불어 없던 일까지 창작해내는 그분의 쎈스에 거부했다. 기다리느라 경찰서에서 3시간을 서 있었다.(의자가 없었다ㅠㅠ)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합의는 없을 것이다. 법대로, 원칙대로 처리해야 함을 굳게 다짐했다. 경찰서의 인테리어와 내부 공기는 사람을 바른(?) 생각으로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우울한 토요일 오후와 밤을 보냈다. 그리고 내리던 비는 일요일, 오늘 그쳤다. 우리는 멍멍이 동생들과 산책을 나갔다.

나뭇가지에 피었던 벚꽃이 땅에 내려와서 벚꽃 눈이 되었다. 결혼식장 버진로드에 뿌려진 장미꽃잎처럼~벚꽃나무 주변은 꽃잎으로 분홍빛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재미~상황이 어찌 되었든 봄은 오고, 일은 원칙대로 해결하리라. 벚꽃길을 3시간을 걸었다. 많은 가족들이 벚꽃과의 이별을 기록하는지, 비 그친 화창한 날씨를 기념하는지 돗자리를 펼치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평화로운 장면이 여기저기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봄은 반복되었고, 꽃이 피는 것도 반복되었다. 다만 나는 예전의 나와는 다르다. 나뭇가지에 핀 꽃도, 땅에 뿌려진 꽃잎도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지식 자산과 더불어 현명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틈틈이 살아가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되는 봄날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수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