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이글먼*앤서니 브란트, '창조하는 뇌'
p.288
예술 덕에 우리는 자신의 세상만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이 스스로 그 수를 늘려가는 것도 본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
미래 예측은 새로운 사실은 물론 상상으로도 이뤄진다. 예술 작품은 늘 미래로 가는 길에 영향을 주는데 이는 예술 작품이 현실의 역동적인 재편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그렇게 가치를 평가받으며 여론을 미리 살펴보는 시안처럼 쓰이기도 한다. 우리는 실현 가능한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면서 직접적인 체험보다 여기에 더 많이 의지한다. 비용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며 실제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시도하지 않고도 평가가 가능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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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자신의 시뮬레이션을 문화적 구름 위로 업로드해 인류가 현실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까지 보게 해 준다. 즉 예술 작품은 항상 여러 가능성에 영향을 주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길을 훤히 비춰준다.
이러한 대체 길은 역사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폴레옹은 극작가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이 프랑스혁명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다고 믿었다. 이 연극에서 하인은 주인 백작보다 늘 한 수 위로 나와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자신이 주인보다 나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로 정부 당국이 그토록 신속히 예술을 억누르는 것이다. 일단 어떤 가능성을 업로드하면 그 가능성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는다.
'만일 ~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세계정세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공상 과학 소설을 면밀히 검토했고, 공상 과학 소설 작가를 모집해 각자의 가장 기발한 가능성을 제시하게 했다. 실행에 옮길 진짜 계획도 아니고 활용하지도 않을 그 가능성이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추축국에 새어 나가기도 했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무역 센터 테러 공격 이후에도 몇 년 동안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미국 국토안보부는 공상 과학 소설 작가들을 모아 '국가 이익 관련 공상 과학 소설'이란 기치 아래 다양한 테러 공격 예상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그때 참여한 공상 과학 소설 작가 중 하나인 아를란 앤드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상 과학 소설 작가는 늘 미래 속에서 산다.
국가 안전을 지키는 이들은 우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길 원했다.
인간은 워낙 창의적인 종이라 사실과 허구에 의존해 세상을 헤쳐 나간다.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는 뇌 속 신경 부위 덕분에 우리는 눈앞의 현실에서 벗어나 멀리 미래 가능성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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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만일 ~라면 어떨까?' 하는 끝없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 가지 중요한 기능,
즉 예상하는 세상 모델을 다수 만들어내 보다 넓은 지평을 돌아보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코로나 팬데믹 2년 차가 되면서 낯선 단어, 알고는 있지만 관심 없던 단어,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NFT, IoT, ESG, 메타버스 등등의 단어가 뉴스에도, 책에도, 일상에도 곳곳에 다가와있다. 진정한 뉴 노멀(New normal)은 생소한 단어를 어디선가 들어봤고, 자주 보고,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놀이이자 취미는 '종이 인형 놀이'였다. 매일매일 기분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고,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가는 일상을 상상하는 취미가 있었다. 동화책이나 '소공녀'와 같은 소설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생각을 종이 인형으로 표현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지금은 이런 세상을 메타버스라는 세계로 생동감 있게, 구체적으로, 실체가 있게 그려놨다는 것이 '나 혼자만의 상상'이 아닌 '모두와 같은 화면을 보고 공유'한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메타버스 세계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무한히 자라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나 혼자만의 세상'을 세상 밖으로 생동감 있는 아바타'로 데리고 나왔다는 것.
코로나는 바이러스로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일상, 마음을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고 있다. 어려운 경제 환경, 그리고 답답한 마스크라는 하드웨어를 제외하고 본다면, 생각과 영혼 같은 소프트웨어를 통째로 바꿔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뉴 노멀은 스멀스멀 그렇게 다가왔다.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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