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그리고 어떤 날은 종종 마음속 화난 감정이 비오기 직전의 먹구름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작년 여름, 브런치 시작을 전후로 이런 먹구름이 찾아오는 날은 좋은 글감이 되었다. 브런치 시작 전에는 매운 떡볶이가 나를 위로했다면, 시작 후에는 글로 내가 나를 위로한다.
나에게 글이란 타인을 위한 글이 아닌 나를 위한 글이다. 내 글의 제1독자는 나다. 내 글을 첫 번째로 읽고, 마지막까지 읽는 사람이다.
몇 년 전 바뀐 업무지로 인하여 알게 된 거래선이 있다. 여유롭게 운영되던 그곳은 작년 초 코로나가 찾아오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감원을 했고, 작년 연말부터는 폐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측은지심이 쌓여갔다. '사장님의 비애(?)'같은 그 고민을 몇 번 듣다가 올해 초, 어떤 조언을, 컨설팅을 해주었다.
업계 관련 뉴스를 보면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 결론이었다. 업체는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결국엔 실행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망설였던 그 거래처는 올해 제법 큰돈을 벌었고 앞으로도 벌게 되었다. (아, 이런 아이디어와 촉은 내가 살 주식 이름으로 떠오르지 않고, 어쩌다 업무에만 반짝이는 건지 ㅠㅠ)
어려운 상황에서 반전으로, 코로나 이전의 상황 이상으로 올라선 그곳은 나에게 어떤 감사를 표했을까?
이 역시 반전이었다. 감사하다는 그 어떤 말 한마디도 없었다. 원래 본인의 직관과 실행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거기다 웃으면서 막말까지 던졌다. 기세 등등함을 넘어선 그 거만함과 오만함이란...
이렇게 상대의 민낯을 제대로 보았다. 사회생활이라는 가면, 페르소나 속에서 보지 못했던 진짜 모습을 보았다. 보통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 사람의 진짜 본성이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보니, 어려운 상황을 벗어난 직후에도 본성을 알 수 있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가 아닌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놓고 보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고나 할까.
친밀한 사이도 아니라서 배신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은 아니지만 이래서 남의 일에 적당히 해야 한다는 '적정선'을 어긴 건, 내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에게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크게 3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1. 배려에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
2. 배려를 기억 못 하는 사람
3. 배려는 당연함으로 + 추가로 더 많은 배려와 또 배려를 요구하는 사람 =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 부류
(이런 부류는 발견 즉시 손절, 사람을 거르는 기준 중 하나)
이번 기회에 나는 사람 한 명을 걸렀고, 상대방은 사람 한 명을 잃었다.(인스타에서 본 표현 참고함) 업무적인 관계는 이어나갈지라도 그 어떤 도움의 기회나 단서를 다음엔 주지 말아야지. 난 아무나 도와주지 않는데, 그런 복을 걷어찬 상대방이 복이 없다고나 할까. 정신승리 같은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사람은 겪어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그것도 좋은 상황, 나쁜 상황 둘 다 겪어도 알까 말까 한 게 사람 마음, 사람 풍경이다.
요새 사회생활 만렙이라고 떠도는 글과 사진들을 종종 보고 있다. '오'하는 공감 표현도 있고, '이건 쫌~'하는 좀 과장된 표현도 보인다. 하지만 이 작은 핸드폰 화면 속 '사회생활' 사진 한 장에 많은 사람들의 '좋아요' 공감 버튼이 눌린다. 사회생활이란, 인간관계라는 건 이런 무한 짤과 이모티콘이 생겨날 만큼 어려운 것인가 보다. 하긴, 나의 늘어난 연차에도 사람 보는 눈은 그리 높아지지 않는 걸 보면... 한 번에 딱 알아보는 신기 같은 능력이 있다면, 살아가는 게 편해질까?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양귀자, '모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