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인, '만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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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적인 공황으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곧, 나는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어리둥절해하는 후배에게 환자를 떠넘기고 나는 집으로 가는 차를 몰았다. 주치의가 포기해서 곁을 떠나버린 환자는 절대로 오래 살 수 없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퇴근길 어두운 불빛 속에서, 그 멈춰진 차 안에서, 후배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고, 그것으로 그녀는 죽었다. 나는 후배에게 '미상, 사인을 알 수 없음'으로 사망진단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전화가 끊기자 나는 곧 울기 시작했다. 고요한 울음은 점점 커져 결국 통곡으로 변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핸들과 계기판을 내리치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집어던졌다. 입으로는 알 수 없는 비명과 욕설을 내뿜으며.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며 불행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보다도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기로,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경기도에서 운영하는 채널에 남궁인 작가가 출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줌으로 만나는 강의를 신청했고, 시작 직전에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10분 지각했다.
짧은 글에 뭉클함을 전해주던 글의 주인을 줌으로 만났다. 워낙 유명한 작가이자 응급의학과 의사이지만 제대로 작가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동생이 남궁인 작가의 글을 좋아해서 카톡으로 가끔 글을 보내주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담백하게, 날 것 그대로의 감성과 이성이 담긴 짧은 글이었다.
작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응급실에서 바라본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엄숙한 주제에 신청을 잠시 망설였다. 예쁘고 좋은 것에 눈이 가는 마음. 애써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다.
무거웠다. 강의 중간중간 처참함에 가슴이 뛰고, 나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젖히게 되었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는 빈자에게 유독 가혹하고, 참혹했다. 응급실이라는 공간을 들어오는 것도, 그들을 마주할 의료진에게도 이중삼중의 관문이 존재했다. 바이러스 음성을 확인하는 일과 동선 등등. 거기다 건설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노동자에게도.
안 듣던 경제 관련 채널을 유튜브에서 보기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떤 이에게, 어떤 세계에서는 엄청난 호재였다. 주가는 폭등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그 행운의 조각이 나에게도 떨어지길 바라며 경제 채널을 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빈부 격차는 심해졌고,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결론으로 나온 날이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경제 수식어 사이에서 불평등에 관한 언급은 1분도 할애하지 않았다. 경제 채널의 본 목적은 '돈을 벌자'이므로.
아주 가끔이라도 남궁인 작가를 경제 채널에서 만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자, 불평등의 세계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줄 사람. 작가를 특정 채널이나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보기엔 아쉬웠다. 불평등은 경제 활동의 결과다. 배려라는 사회 복지의 일부분이 아니다. 빅데이터 전문가가 세계에서 자동화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한국이라고 언급했다. 그만큼 사람들은 기계에 의해서 밀려났고, 소외됐다.
강의를 듣는 한 시간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한숨이 나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가려진 장막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남궁인 작가에게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글에서도, 언어에서도 담백한 문장 안에 빼곡한 그 무엇을 전달해준다.
우리가 많은 전문직 중에 직업이 '의사'라고 하면 존경의 눈빛과 마음을 갖게 된다. 단순히 경제력만으로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살린다'라는 점에서 직업에 대한 존경을 내포한다. 돈이 많다고 치면 사업가가 최고지만, 그들을 부러워할 뿐, 존경의 마음은 좀처럼 갖기 힘든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과 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응급의학과, 그리고 그 내밀하고 가려진 장막을 열어준 작가에게 존경을 표한다. 빛이 강하면 어둠이 짙어지듯이, 우리에게는 두 개의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작가의 글이, 언어가 세상을 움직이길 바란다. 다른 두 개의 세상에 연결 고리가 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