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네 브라운, '수치심 권하는 사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될 때 수치심을 느껴요.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남들이 왜 자기를 싫어하는지 이해하는 거예요.
수치심은 감옥 같은 거예요.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 하는 그런 감옥 말이에요.
-p.31-
죄책감은 자신의 윤리관, 가치, 믿음에 반하는 행동이나 태도를 취할 때 생긴다. 나의 행동이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과 일치하지 않을 때 이 감정이 생겨난다. 반면에 수치심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을 나쁜 사람, 거짓말쟁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하면
정말로 그렇게 믿고 결국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매우 위험하다.
- p.39 -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귀엽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성인이 되면 결혼하고, 성공하고, 아이를 낳고, 남들이 다 하는 육아법으로 아이를 기르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조화로운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주위 사람들만 우리에게 기대를 거는 게 아니다. 미디어가 버티고 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짜깁기한 완벽한 이미지를 홍수처럼 쏟아내며 누구나 완벽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 p.223 -
한때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유행했고, 관련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나 또한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몰입해서 관련 영상을 보고, 책 읽기를 무한 반복했다. 나의 약한 멘털이 조금이라도 올라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물론 책도 일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어딘가 계속 불편했고, 나를 향한 막말은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날아왔고, 어떤 날은 비난의 화살이 마음 깊숙이 박혔던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불편함을 나의 분노와 우울, 예민함, 짜증으로 그리고 타인의 무례함으로 정의 내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갖고 있는 불편함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 수치심과 불안, 죄책감이라는 단어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나의 말도 안 되는 바람인 '완벽함'이라는 허상까지도.
이 책의 목표는 수치심을 느낀 후 '회복 탄력성'을 기르는 통찰력과 전략을 알리는 것이다.
수치심이라는 존재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수치심 탄력성의 기초가 된다. '비판적 인식 실천, 손 내밀기, 수치심 말하기'라는 단계를 통해서 수치심의 늪을 스스로 빠져나오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상은 '정상, 보통, 평범함'이라는 단어로 수치심을 강요한다. 남들과 비슷한 월급(?), 차, 집, 가정, 그리고 미디어에 나온 연예인들의 날씬한 몸과 적당한 패션 감각, 대인 관계, 인맥이라는 단어는 사실 평범하지 않다. 거기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력과 과정, 희생은 보이지 않고 연예인들의 완벽한 '리얼 예능'처럼 두루두루 다 잘하는 슈퍼맨, 슈퍼우먼을 알게 모르게 강요당한다.
세상의 양극화는 늘 존재했지만 코로나 이후로 더 심해졌다. 위기는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었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인플레이션으로 상황은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 경제적인 것 외에도 사회 분위기도 달라졌다. 모 정치인의 '편 가르기' 멘트처럼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당당하게 편 가르기를 하곤 한다. 왜냐하면... 편에 소속되지 못하는 당신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를 들어가며.
예를 들면 나의 경우는 현재 나이에 미혼이다. 그런데 내 주변엔 미혼이 거의 없다. 나에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콕 집어서 단점이나 갖고 있지 않은 것만을 말했다.
"그렇게 잘하는 게 많은데 왜 아직 결혼을 못했을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 뭘 더 배울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넌 결혼이나 해~."
" 아~이걸 잘 못하네. 그래서 결혼을 못했구나ㅋ"
" 남들 다 하는 결혼도 못한 스케치북 ㅋ"
" 너 계속 결혼 안 하면 더는 우리 모임에 안 끼워준다."
위에 있는 문장은 최근 3년 동안 들었던 이야기 중에가장 별로라고 생각했던 말이다. 막말을 눈앞에서 들었을 때, 나는 멋지고 쿨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순간 온몸이 경직이 되었다. 싫어했던 사람이라면 바로 반격을 했을 텐데, 가까웠던 사람이었던 만큼 순간 머리가 멍해지다가 반격의 시기를 놓쳤다. 또 어떤 말은 마음에 오래 남기도 했다.
나를 비난하는 이유는 남들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좀 억울했다. 심심하다가 놀아달라고 한 적도 없고, 밥을 사준 적은 있지만 누군가에게 신세를 진 적도 거의 없었다. 누군가에 어떤 불편함을 준 게 아닌데 그저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비난받아야 할까? 옆에 다른 미혼인 재력 있는 사람이나 전문직인 분에게는 극 존칭과 싱글이 부럽다는 미사여구만 늘어놓으면서, 왜 나에겐 이런 막말 세례를 퍼부을까?
'내가 뭘 잘못했지?' 처음엔 억울하다가, 분노하다가... 어떤 날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내 미래가 특별히 잘못될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엔 정말 내가 문제가 너무 많은 사람이 아닐까하고 더 작아졌다. 그렇게 스스로를 내 안의 감옥에 가둔 날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 멈췄다. 이 안의 많은 사람들 이야기는 사실 나의 이야기였다. 나였다. 미디어에 나온 완벽함을 꿈꿨고, 현실의 그냥 그런 나를 한없이 작게만 보는 나를 보았다. 감정이입이 너무 잘돼서 다음 페이지를 읽지 못하는 책이랄까?
더 완벽해지고 싶었다. 내 옆엔 아내로, 엄마로, 직장인이라는 3가지를 다 잘하는 동기를 보면서, 나는 내 한 몸도 이렇게 잘 키우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다. 취미 생활은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학사과정은 어쩌면 나를 향한 채찍질이다. 싱글인 나는 워킹맘 동기보다 3배는 더 잘해야 정상이 아닐까?
날씬한 몸, 재능, 취미와 취향, 경제적 능력까지 더 많이 갖춰야 정상(?)이 아닐까? 처음엔 누군가의 비난이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나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주말~편안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좋다가도 불안해진다. 내가 이래도 될까 하는 마음으로.
불안감이라고 생각한 그 모호한 마음을 투명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지금의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어떤 면에서 수치심을 느꼈고, 수치심은 불안감을 데려왔다. 그리고 나는 조급해졌다. 최근 3년 나의 변화는 다양한 감정과 세상의 흐름과 맞물려서 일어났다.
브런치에 고백하자면 수치심은 내 인생이고 일상이다. 3년 전 코딩을 배우러 갔던 곳은 20대가 대부분, 최고령의 내가 부끄러웠다. 거기다 수업 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결국엔 중도 포기했다. 지금 배우는 연극 아카데미 역시 모두 20대다. 거기다 다들 초보가 아니었다. 당연한 초보임에도 나는 사람들만큼 연기를 못한다는 것과 나이가 수치스러웠다.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지만. 올해 시작한 문화공간에 참여하는 모임에서도 늘 나이가 부끄러웠다. 여기에는 30대도 있었지만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였다.
한 마디로 나의 새로운 도전은 늘 수치심과 함께였다. 내 나이의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 20대 사람들 사이에 있는다고 해서 내가 그들과 '우리'가 되지도 않았다. 나는 여기저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였다. 내가 느꼈던 모든 불편함의 뿌리와 수치심의 성장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책 한 권이 보여줬다.
책이나 강의는 ‘개성’을 강조하고,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반대로 주변의 사람들과 미디어, SNS는 ‘남들만큼, 남들처럼’이라는 단어로 '보통, 정상, 평범'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너무나 다른 두 세상에서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토대에 필요한 '수치심 회복탄력성' 그리고 '자존감'.
'내 안의 감옥'에 오래 갇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수치심을 느낄 수는 있지만 감옥에는 걸어가지 않도록, 인정하고 실수하고, 성공하기를 반복하면서 내가 더 자라나길.
나를 제대로 보려면 나, 주변 환경, 세상이라는 3가지를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는 팩폭을 날린 엄청난 책. 동네 산책 2시간 동안 머릿속을 채웠던 이야기를 이렇게 브런치에 옮기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나의 수치심을 고백합니다. 사실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새로움에 도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