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태도가 만든 운명

by 그럼에도

언제까지 이렇게 내 인생을 쏟아부어야 할까?


미움은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미움이라는 녀석은 지금 내 하루의 절반을 넘게 지배하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마음에 지금의 결혼 생활을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결혼 전, 남편의 어머니는 '며느리의 조건'을 말씀하셨다. 그건 '직업은 없어도 되고, 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나이가 어려서 아기 낳기 좋은 상태'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시작한 반대는 과거 '사랑과 전쟁' 드라마에 나왔던 악독한 시어머니들의 대사를 외운 것처럼 몇 시간을 화장실도 가지 않고 쏟아부었다.


그렇게 지독한 저주로 시작한 결혼이었다. 당연히 결혼 지원은 없었고, 오랜 시간 분노를 불 뿜는 용처럼 발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알게 되었다. '며느리 조건'의 당사자는 첫째 며느리였다는 것을. 아들보다 여덟 살이 어렸고, 대학을 갓 졸업한 무직인 상태였다. 결혼을 하고 곧 아이를 낳았고, 박사라는 학력은 남편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서 만들었다. 그리고 강사라는 직업까지 완성되었다.


난 그 조건과 완벽한 반대였다.


나이는 많았고, 직업도 있었고, 아들보다 나은 경제력이 있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반대의 심각한 이유가 되었다. 나이가 많으니 아이 낳기가 어렵고, 외근이 많은 직업은 자랑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아들보다 잘 벌어서 아들을 무시할까 봐.... 기타 등등의 이유로 결혼 후에도 악담은 쉬지 않았다.


조건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태도 역시 정반대였다.


첫째 며느리가 결혼 후 오 년 동안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거의 하지 않는 카톡 며느리였음에도 불만이 없었다. 미국에 보낸 반찬을 '마트에도 파는 걸 왜 보냈느냐?'며 면박을 주어도 '며느리의 개성'이라며 쿨하게 넘기던 분이었다. 마마걸이자 돈 문제로 아들과 다투어도 '여자는 원래 친정에 뭐든 주고 싶다'는 말을 하며 큰아들을 달래던 천사 시어머니셨다고 들었다.


그렇게 사랑받는 첫째 며느리는 시댁이 망해가는 상황에서도 전화 한 통 없다가 여름휴가 때 한국 들어간다며 콘도 예약을 부탁했고, 그 상황에서도 '알았다'면서 역시나 쿨하게 대답하던 그분, 남편의 어머니였다.


남편의 어머니는 사기 사건을 당하고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뒷수습을 하는 나와 둘째 아들을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본인의 마음을 완벽하게 글로 표현하지 않았다면서 몇 번이고 수정에 수정을 요구했다. 막상 본인도 본인의 마음을 모르고, 본인의 기억이란 것도 허술했다. 거기다 천박하다던 돈 얘기를 꺼냈다.


"넌 퇴직하면 어떻게 돈을 벌거니?"


정직원이 아닌 아들에게도 묻지 않던 돈 얘기를, 정직원이자 이 집안의 의식주를 오롯이 혼자 해결하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돈 벌 방법을 물어보셨다. 거기다 강남의 OO동네에 이사까지 권유를 하셨다.


강북에서 월세도 못 얻을 아들의 연봉을 뻔히 알면서 말도 안 되는 동네로 이사를 권유했다. 거기다 그분의 며느리 조건은 '무직'아니었던가? 집안이 망하니까 말 끝마다 돈 얘기가 붙었다. 상황이 바뀌니, 천박한 건 그분의 입이었다.


그분이 당한 사기가 완벽해서라는 건 그저 변명이었다. 언제나 두서없이 본인이 믿고 싶은 데로만 믿고 살아온 평생의 소신과 태도가 사기를 당한 이유라면 이유였다.


게다가 진심 어리게 사기꾼을 좋아하셨다. 아들 또래쯤 되는 남자라고 알려진 사기꾼을... 눈을 반쯤 감고는 사기꾼과 나눈 메시지를 옛날 첫사랑을 떠올리는 자세로 말씀하셨다. 아들 또래의 남자가 기러기아빠로 산다는 멘트가 왜 챙겨주고 싶고, 좋아하게 된 이유가 되는 걸까? 젊은 남자가 밥 한 끼 혼자 못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 배달 천국의 나라에서... 누가 누굴 걱정하고 챙겨주고 싶었다는 건지... 몇 번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복한 중산층에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을 뻔한 상황에서도 사기꾼을 미워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사기꾼도 밉지 않다는 분이 화살을 다시 나에게 쏘아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화풀이, 분풀이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못났을까? 아직도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저 사기꾼의 사기 방법이 완벽해서 넘어간 것이라면서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말씀하셨다. 사기 후 한 달은 좀 피곤했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완벽히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그분을 보자면 왜 내가 한숨이 나올까?


그분은 완벽하게 속았고 또 주변을 완벽하게 속이는 중이었다. 아들의 사업자금을 위해 집을 팔았고, 건강을 위해 실버주택으로 들어가고.... 남을 속이고 본인을 속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렇게 본인을 또 속였다. 그렇게 그분이 살아온 인생의 태도와 가치관이 지금의 운명을 만들었다.


그래서 인생은... 마음과 행동을 수시로 다듬고, 고쳐나가야 할 일이었다. 나 역시 이렇게 그분을 미워하는 마음과 부조리함을 더는 상기시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인생은 짧으니까.


더는 그분이 내 인생의 에너지를 빼앗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고 멀리 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너무 아팠고, 지금 모두와 헤어져도 아쉬움이 없을 만큼 할 만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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