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니까, 네가 이해해야지. 네가 참아야지."
엄마는 어려서부터 장녀로서, 첫째로서의 의무를 말씀하셨다. 언제나 동생이 먼저였다. 특히 셋째 딸에 대해서는 '처음 아기를 낳아본 것 같다, 아기가 너무 예쁘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이십 대에 낳은 애들은 예쁜 줄 몰랐는데 삼십 대에 아기를 낳아 보니 이제야 아기가 예쁘다는 설명이었다. 거기다 셋째는 유독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그렇게 유난한 차별이 시작되었다.
집 밖에서도 차별은 있었다. 성적순으로, 싸움을 잘하는 순으로 뭔가 등급이 매겨졌다. 이도 저도 아닌 아이들은 한 무더기처럼 그저 배경을 채워주는 엑스트라 같았다.
회사에 들어와 보니 이제는 학벌, 거기다 집 주소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했다. 일을 잘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변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내가 사는 곳은 처음부터 '평등'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평등함을 누려보지 못해서인지 나 또한 이런 세상에 쉽게 물들어버렸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고 인생의 전환점 같은 순간이 찾아온 이후로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고, 보았어도 쉽게 넘겨 버렸던 '부당함'이 보이고 느껴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결혼을 할 때도 엄마는 나에게 축의금이라며 백만 원을 보내주셨다. 이것도 꽤 감사했다. 비슷할 때 결혼한 동생에게 결혼 축하금으로 몇천만 원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차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일을 겪고 보니, 그동안 보고도 눈 감았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집에 바쁜 일이 있거나 김장처럼 일해야 할 때도 셋째는 오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일이 생겨도 첫째와 둘째만 챙겼다.
셋째는 본인이 놀고 싶을 때, 엄마한테 받고 싶은 게 있을 때만 내려왔고 호캉스를 온 사람들처럼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사라졌다. 그렇게 설거지 한 번을 하지 않고, 부모님 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 먹고는 사라졌다.
대신 아빠에게 술 따라주면서 코맹맹이 소리를 하고, 엄마에게 애교 몇 마디를 수고비처럼 건넸다. 그게 사랑을 받는 이유였고 유일한 의무였다.
그런 부모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효도는 셋째에게 받으세요. "
"등골 빼먹는 자식과 퍼 주는 자식 따로 있는 거예요?"
전화를 끊었다.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특별한 변화가 있을까? 있다 해도 마음은 전과 같지는 않았다. 문제를 만든 셋째에게 전처럼 따뜻하게 대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잘못을 가르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피해자는 있는 데 가해자가 없는 게임처럼.
'생각하면 네 건강에 안 좋으니까 이제 그만해라'라는 엄마의 말은 지금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 자식을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정말 자식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다른 방향일까?
희생하는 자식 따로. 퍼 주는 자식 따로.
나를 망쳐가면서 부모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