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원망하는 건 쉬웠는데 가족을 미워하는 건 어려웠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걸 손에 꼽으라면 그다음은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느리고, 생각이 없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대로만 살아서 지금 이 모양이 된 게 아닐까?
사실 가족에 어느 정도의 희생을 한 것도 시킨 게 아니라 스스로 셀프서비스로 진행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움직였다. 그저 무색무취한 인간. 사춘기도 못 느낄 만큼 참아왔던 것들이 이제 마흔이 넘어서 터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부모가 알아온 사람과도 달랐고, 내가 아는 나와도 달랐다. 한 번 원망과 화를 말하고 나니, 나도 몰랐던 감정들이 몇 달이고 밀려왔다.
작은 말 한 마디가 불러온 불씨에 몇 달이고 꺼지지 않는 산불처럼 가슴이 타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미운 건 나였다. 그때 동생을 내 집에 불러들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 미래는 없었고 그저 내 주변만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마침 못난 자존심과 학벌주의가 마음에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입사하고부터 운이 나빴다. 사내에서도 팀원의 평균 연령이 높고, 알코올중독 꼰대가 팀장인 곳으로 배치되었다. 그때부터 학벌 콤플렉스가 시작되었다.
같이 발령받은 여직원은 '서울대' 출신이었다. 나는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혼났고, 어떤 말을 해도 콧웃음을 치던 선배들과 팀장들이었다. 반대로 서울대라는 이름만으로 칭찬하고 띄어주기 바빴던 사람들.
"땡땡이는 서울대 출신인데, 그럼에도는 서울 oo 대라고 ㅋㅋㅋ"
말하는 사람들도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처음엔 억울하다가 어느 순간 물이 끓는 줄도 모르고 그 속에 잠겨있는 개구리처럼 나는 서울대콤플렉스에 단단히 사로잡혔다. 그쯤에 지방에 있는 동생을 서울 유명 사립여고로 전학을 시켰다.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기를 바랐고, 사교육에 월급의 일부를 내밀었다. 그렇지만 녀석은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고 교우관계 역시 좋지 않았다.
그러던 녀석이 고3이 되었다. 녀석의 담임은 대학 잘 보내기로 유명하다는데 그것 딱 찍어서 특정인만. 담임 면담에는 면접권처럼 돈을 건네야만 한다고 말했다. 사립이라 대놓고 돈을 요구할까? 그때는 김영란법이 없기도 했지만 여긴 특별히 자유분방했다.
녀석의 말을 믿고 분기별로 상품권을 건넸고, 건네받은 담임은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고 본인의 빛나는 경력을 노래처럼 읊었다.
그렇게 수능을 봤지만 녀석의 상태로 보아서 인서울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취직까지 할 능력은 안보였다. 사교육 이년, 옆에서 지켜보니 녀석은 능력도 간절함도 없었다.
그래서 취직이 잘 되는 지방대 모학과를 권유했다. 결국 예상대로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었다. 대학에 간 시간을 제외하고 다시 내 집에서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녀석과 함께 살지 않았다면 나의 결혼이 빨라지지 않았을까? 더 빨리 집을 사지 않았을까?
같이 살면서 생활비는 곱절이 들었고,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로 다툴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연을 끊어야 할 만한 상황이 올 거라는 예상하지 못했다.
늦은 결혼과 시험관... 벌써 여러 번을 실패했고 임상실험을 하듯 할 때마다 새로운 약물과 다른 방법을 시도한다.
지금 나이에 모아둔 돈도 많지 않고, 회사에 다닐 시간도 길지 않고, 아이를 갖는 게 욕심이라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닐까라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가장 미운 건 나였다.
그 누구보다 내가 미웠다. 나는 나와 살아있는 동안 함께 해야 하는데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언제쯤 용서할 수 있을까?
미워하는 사람은 안 보고 살 수 있는데, 미워하는 나를 안 보고 살 수 없으니 살아가는 게 재미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도 반려견도 건강하다는 것. 그것 하나가 현재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파랗고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