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시작도, 중간도, 결말도 분노였다.
시작은 남편의 어머니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일의 후폭풍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한 연기를 시작한 그분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고 과거 있었던 그분의 만행까지 떠올리며 분노가 몇 번"이고 다시금 올라왔다.
나와는 반대로 아파트 두 채를 날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분은 금세 평화를 되찾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그렇게 강남 자가에서 경기도 한적한 동네 전세로 옮긴 후에도 그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하여 전처럼 막말과 무례한 갑질을 되풀이하고자 했었다.
오랜 분노가 나에게 가르쳤던 것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분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그건 그분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왜 예외를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설날을 건너뛰었을 뿐인데, 이번 추석에도 오지 않을까 하면서 걱정을 하셨다. 남편의 어머니는 수시로 심부름도 시키고, 막말도 하고, 주기적으로 점심을 얻어먹으며 드라이브도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마도 영원할 줄 알았던 막장드라마가 일 년을 조금 넘기고 끝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시다니.
본인에 대한 반성보다는 원래의 일상대로 돌아오길 바라는 그분이었다. 사라진 아파트처럼 과거의 일상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분노는 십 년 넘게 뒷바라지한 동생이었다.
녀석과는 열 살 차이였다. 고2 때부터 30대 초반 결혼 전까지 경제적인 지원을 쏟아부었다. 녀석은 결혼하기 직전부터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거친 말과 연극배우를 보는 듯한 과장된 행동, 만취해서 오는 날이 잦아졌다.
녀석이 결혼한다는 남자는 과장된 행동, 큰 웃음소리, 돈 버는 이야기를 쉬지 않고 늘어놓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기꾼에게 끌렸다니. 곧 그 남자의 행동이 동생의 행동이 되었다.
동생과 사이에서 불화는 서서히 쌓여갔다. 녀석의 남편은 그렇게 돈, 돈, 돈을 말하면서 얻어먹는 데만 익숙했다. 어쩌다 몇 만 원이라도 내게 되면 동생을 통해서 "너네 집은 참 이상해. 우리 집은 엄마가 다 내는 데. 왜 내가 돈을 내야 해?"라며 동생에게 따졌다고 했다. 그걸 들은 녀석은 반박 대신 언니에게 그 말을 전달했다.
얻어먹으면서도 계속 얻어먹는 공짜 정신. 일할 때는 쏙 빠지고, 놀 때만 등장하는 양아X. 큰 소리로 떠들면서 과하게 비위를 맞추는 행동이 사극에 나오는 내시를 연상시켰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녀석의 남편은 꺼림칙한 그 무엇이 느껴졌다. 겨우 서른 살이 넘었었는데, 어떻게 살면 저렇게 될까?
그렇게 추석이 되고 오랜만에 마주쳤다. 임신 초기인 녀석은 그날따라 시비를 걸었다. 나 역시도 이미 신경이 날카로운 시기였다. 결국 둘은 그 자리에서 화장실 문을 세게 열었다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소리가 오고 갔다. 녀석은 몇 마디로 기선 제압을 하고 싶었는지 크게 질렀다.
"너 지금 내가 임신해서 부러워서 그렇지. 이 애도 못 낳는 X야"
그렇다. 나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지만 아직 난임센터를 다니고 있다. 그러니 녀석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녀석은 나보다 열 살이 어리다. 거기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내 월급으로 사교육에 이십 년 전에 천만 원 이상을 쏟아부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내 집에 얹혀살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또한 내 돈으로 가족 여행을 공짜로 다녔다.
한 마디로 십 년 넘게 등골을 빼먹은 녀석이 화난다고 나에게 던진 말은 이런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나는 분노에 치를 떨고 있다. 녀석을 차단한다고 해도, 부모님 집에서 마주치는 것은 완벽하게 막기는 어려웠다.
녀석은 임신을 한 몸으로 거친 입을 갖고 있었다. 화가 나도 태교를 위해서 조심한다는 옛 말과는 다르게 임신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이게 먹고 싶어. 저게 먹고 싶어'라면서 부모님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녀석은 존재는 특별했다. 남매 중에서도 부모님은 막둥이보다 셋째 딸을 가장 예뻐했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모님께 뭐 하나 잘해 드리는 것도 없었다. 그저 존재만으로 사랑했다.
나를 포함한 다른 남매들은 그런 유별난 편애를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유난히 애교가 많고, 목소리가 큰 녀석의 운명인 것처럼. 편애가 왜 문제인지도, 문제라고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늘 그래왔으니까.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이제야 유별난 편애가 눈물 나게 아프게 느껴졌다. 거기다 부모님의 경제적 기반까지 만들었던 나의 노력은 얼마나 초라한지. 그때 집안에 보태지 말고, 강북에 아파트나 한 채 샀어야 한다는 후회까지 더해졌다.
살아온 날이 후회만 보였다. 나의 어리석음이 집 안의 역사였고, 희생이 발판이었다. 친척들 사이에서 칭찬과 시샘의 대상이 되었던 '효녀'라는 간판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
임신을 해서인지, 편애하던 셋째 딸이어서인지 부모님은 동생 편에 서 있었다. 녀석을 다그치고, 집에서 내 보는 대신 이번 주말에도 녀석을 환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의 분노는 다시 불타 올랐지만 이 또한 의미 없는 일이었다.
집 안에 뿌린 돈도 그때의 시간과 에너지도 모두 회수 불가능한 것이었다. 남은 건 눈물과 후회였다.
남편의 어머니는 겨우 이 년이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지만 이 년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런데 녀석은 내 집에서 같이 산 것만 십이 년이다. 현재의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모두 차단하고 홀로 서는 것이다.
어리석은 오지랖과 무모한 믿음이 실패의 이유였다. 사십 년 넘게 산 인생은 한 마디도 물거품, 실패였다. 내 코가 석자인데, 그동안 뭐 하고 산 걸까.
나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만나지 않기로 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은 인생을 분노로 불태우기엔 내가 너무 아까웠다. 가을은 짧고, 인생도 짧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