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독립성, 관계의 자율성에 대하여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보통의 경우라면 총 12년의 시간동안 일정한 주기로 우리는 새로움(new)을 경험했다. 학년이 바뀌고, 학급이 바뀌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들도 바뀌어 간다. 어린 시절이다 보니 아마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더욱 빨랐던 것 같다. 하루도 못 보면 죽을 것 같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 복도에서 만나면 데면데면해지는 경험을 떠올려보면 결국 다 그렇게 될 인연이었던 거란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다. 게다 개인적으론 나에겐 온 청춘(!)을 바쳤던 초등학교 졸업식 직전에 서울로 전학 온 역사가 있다. 생전 알지도 못하는 학교로 전학을 와서 졸업식을 했었던 끔찍한 경험. ‘전쟁이 나서 이 나라가 다 불탔으면 좋겠다.’ 13살의 철없는 나는 아빠 사업문제로 인해 전학을 와야 하는 상황에 부모 속도 모르고 일기장에 그렇게 휘갈겼다. 나름대로 열심히 구축해온 바운더리(Boundary)를 잃어버린 다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 그때부터 확실히 어린이에겐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게된 것 같다. 어린이라는 이유만으로 로터리(lottery)의 원칙대로, 그 단순한 뺑뺑이 방식으로 올 한 해를 보낼 사람들과 공간과 경험이 결정되는 것은 어쩐지 모르게 조금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참 맹랑한 계집애였다.
나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은 묘한 설렘을 가져오지만 한편으로는 그 ‘운’에 따른 무작위성 때문에 무력감을 동시에 준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건 적어도 ‘자기결정권’이나 ‘자율성’같은 것들을 무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조금 더 까칠하게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굉장히 위배되는 사람이 ‘담임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일생일대 제일 중요했었던(아주 잠시나마) 입시문제에 도움을 가장한 권력을 행사 할 때,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물론 호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이었기에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부유한 집안 사모님이셨던 우리 담임은 고3때 나를 제치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대치동의 모 유명한 논술학원 등록을 권했다. 당시 급작스럽게 어려워진 우리 집안형편을 알 턱이 없었다. 집안형편도 형편이었지만, 그 때의 나는, 교과서와 청소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고교생이었기에 공교육 교사가 사교육을 권한다는 것에 화가 났다. 결과적으로 나는 담임의 제안을 거절하고, 저비용 고효율인 듯 보이는 보습학원에 다녔다. 엄마는 빚이라도 져서 담임의 제안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했지만, 결과론적으론 나는 합격했다. 물론 여전히 생각만으로도 감사함에 눈물이 고이게 하는 ‘은사’님도 계신다. 어쨌든 여전히 나는 핏(fit)이 안 맞는 사람과 뭔가 중대한 결정을 도모하는 것이 스트레스다. 어른이 되니 그런 스트레스는 조금 줄어서 다행이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것은 딱 두 가지였다. 경제적인 독립성과 관계의 자율성. 내가 먹고 쓰고 마시고 이 모든 활동의 지원을 내 스스로 한다는 것은 언제나 참 멋있는 일이다. 불로소득이 1도 없는 지금의 노동자의 삶도 나는 만족한다. 거처를 제공해주는 부모님에게 다달이 일정 생활비를 드리면서 거주의 독립을 이루진 못했지만, 챙겨줄 누군가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우리 엄마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주리라 변명해본다.(자식은 원래 그렇게 뻔뻔한 존재다.) 그리고 관계의 자율성. 핏(fit)이 안 맞는 사람과 거리를 좁혀 지내야 할 이유도 없다. 굳이 “좀 저쪽으로 멀리 떨어져 주실래요?” 라고 말하며 얼굴 붉힐 일도 없다. 어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내 과(category)인지 아닌지. 가끔 판단미스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정리하고, 조절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정 없어 보이고, 휴머니즘과 거리가 멀어보이지만..이 것의 장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더 많이 자주 줄 수 있다.(그러고 있나?) 불필요한 감정 에너지 지출은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인간들에게 나의 제한된 에너지를 나누려 버둥거리기보다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의 영속성이 이어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 좋은 아주 희박한 몇 가지 중 하나다.
가끔 사람들 간의 자연스러운 멀어짐에 심한 저항을 보이거나, 한 쪽이 무리하는 관계를 목격한다. 관계에 있어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리를 좁히는 것은 다소 위협적이거나 위태로워 보일 때도 있다. 그런 부자연스러움은 지켜보는 사람들도 매한가지로 편하진 않다. 막상 당사자 나름대론 중차대하고 힘든 일이겠지만, 어차피 그런 관계는 시점의 문제일 뿐 끝나게 되어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냥 무리하지 말고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유지하는 게 바로 어른의 관계방식인 것 같다. 관계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몸이 멀어져서든, 각자 먹고 사는 것이 바빠서든, 해가 바뀌고, 사는 곳의 밤낮이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돈독하고 친밀하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면 잘해봐야 평균 B+ 밖에는 안 될 거다. 그냥 소수에게 A급이 되는 편을 선택하겠다. 이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