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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보 Jan 26. 2022

회사지옥

새해는 2월부터라고 위로하며

2021년 지난 일 년을 돌아볼 틈도, 다가올 새해를 계획할 새 없이 12월 31일에 맞닥뜨린 예고 없던 인사발령은 한 달 여간 나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게 했다. 직장생활 12년 차인데 인사발령이 이렇게 어이없던 건 처음인 것 같다. 새로 발령이 난 팀에 있던 선배와 나를 바꾸어 발령을 냈는데, 그는 내 자리로 발령이 나자마자 병가를 냈다. 결국 나는 바로 직전에 있던 팀의 업무를 들고 1월까지 그 일을 마저 마무리했다. 아직도 이전 팀에서는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다. 이 팀인지 저 팀인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프지 않은데 병가를 낼 수도 없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인인 의사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요새 직장인들이 하도 허위로 진단서 요구를 많이 하다 보니 명확한 진단명이 없다면 절대 안 해준다고 한다. 의사가 자기 면허를 걸고 없는 병명을 적어서 진단서를 써주는 일은 만무하다 했다.(실은 친구에게 내 몰골을 보아하니 적어도 전치 3주는 나올 거 같은데 진단서를 써줄 수 없냐 물었었다.)  


기본적으로 퇴사하고 싶다는 소리에 나는 줄곧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라고. 부당하다 느끼고 나만 일하는 것 같아 억울하지만, 그 마저도 월급이 아쉬워서 다니는 것이지 누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처럼 바보행세, 전 모릅니다-못합니다를 시전 해서 빤스런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도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천적으로 그런 걸 돈 줘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언젠간 꼭 하고 싶다.) 인사발령이 나고 나서 벌어진 감정의 변화는 이랬다. 놀람->의아->분노-> 좌절. 

놀람과 의아는 12월 31일과 1월 1일 정도까지 이어졌고, 그 이후 3주 넘게 분노와 좌절의 감정이 반복됐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나 자신을 보면서 그게 더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째서 넌 아직도 화를 내고 있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1월 내내 바빴다. 그 와중에 술은 참 많이도 마셨다. 별로 기쁜 마음이 아니었으니 매번 쓰린 속을 부여잡고 해장국을 들이켜게 됐다. 거진 주 6일 출근, 매일 12시간 근무를 했다. 내가 이러려고 공기업에 왔나 따위의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일을 빨리 끝내는 것에 몰두해야 했다. 오히려 일만 힘들었다면 버틸 수도 있었을 텐데, 보고서의 '보'도 모르는 무능력한 관리자 집단의 참견질이 시작됐다. 멍청한데 참 부지런하기도 한 사람들이다. 이런 짓 역시 아무리 회초리로 때려도 하기 힘든 것 같지만 멍부(멍청한데 부지런한)는 멍부다. 멍부 관리자의 마이크로 매니징(micro-managing)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어찌 됐던 급한 불은 다 끄고 1차적으론 끝이 났는데, 너무 분노와 좌절의 감정이 깊었던 탓인지 에너지가 모두 다 소진됐다. 고작 올해를 1달 정도 지난 시점인데 말이다. 이번 일이 전혀 나한테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하나도 의미 없는 일에 왜 내 영혼이 혹사당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버린 지 오래다. 직장생활 10년 차, 과장이나 되어놓고 아직도 일에 대한 순수한 마음, 열정 그런 것들이 있을 리도 없다. 그저 돈을 버는 것, 월급을 통해 생활을 유지해야 하니 회사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고 속으로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나 조직에 대한 들뜬 희망이 있기에 나는 나이를 너무 먹었고, 열정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길은 뭘까.

 

오늘은 오랜만에 헬스장에 갔다가 어이없는 봉변을 목격했다. 직접 당한 것은 아니니, '목격' 정도로 치자. 탈의실에서 헐벗은 운동복 차림새의 성난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갑자기 수건을 거울을 향해 던지더니, 일어나서 갑자기 수건을 쥐어 잡고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알몸인채로 발망치를 쿵쿵해대며 말이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누구한테 화풀이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바로 옆 거울에서 옷을 갈아입던 나는 상당히 기분이 잡쳤다. 그런데 러닝머신을 타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공연히 아무 데나 화를 내는 것이 꼭 회사에서의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올해는 그저 내 인생의 별 의미 없는 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만큼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회사 사람 포함이다. 오늘 누가 그랬다. "너 그렇게 힘들면 그냥 퇴사하고 딴일 해."

난 대답했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하니? 그 사람들이 퇴사해야지."

아마 별일 없는 한 올 해도 이 회사에서 존버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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