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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보 Oct 04. 2022

강남 한복판 무덤 산책 '선정릉 방문'

미세먼지를 마시며 선릉과 정릉을 방문했던 날의 기록

뭐가 그리 바빴던지, 오랜만에 친한 지인을 만나러 여의도를 방문했던 날. 약속을 마치고 휴일에도 출근을 했던 모친을 만나기 위해 강남으로 향했다. 점심 약속이 서너 시간 남짓이었지만, 주말에도 빡빡하게 들어찬 9호선 급행선, 새로 연(!) 더현대 서울을 피해 갔던 여의도 IFC에서도 점심시간 이후 들어차는 사람들의 떼를 보고 있자니... 너무나 기가 빨렸다. 나와 그나마 비슷한 성향의 친구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녀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압도적(?)이어서 그 피곤함을 몰랐지만, 헤어지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넉다운이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대형 쇼핑몰 체질은 아니다.


엄마를 기다리며 근처 선정릉역을 배회하다 결국 왕의 무덤을 찾아가게 됐다. 주말에는 커피숍도 만석에 시끄럽고, 차 한잔 조용히 마시려다가 부리나케 쫓기듯 나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치솟은 기름 값에 차를 두고 여의도를 다녀온 터라,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걸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선정릉역에 내려 성곽길을 따라 입구까지 걸어갔다. 생각해보니 도쿄에 갔을 때도 사람 많은 롯폰기나 하라주쿠 이런 곳이 아닌 공동묘지를 갔던 생각이 나서 혼자 킥킥거렸다. 국내나 외국이나 예로부터 훌륭하신 분이 묻혀있는 묘지에서는 적어도 목청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떠드는 간 큰 인간은 없다는 게 내가 그곳을 향하게 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이 날은 문화재청에서 무슨 공연 행사가 있던 것인지,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 인파를 피해서 묘지 전체를 유유히 걸었다. 총 소요시간은 약 50분 수준이었는데, 사람도 그나마 적고 한적한 분위기에서 오랜만에 피톤치드 향을 맡았으나, 초미세먼지가 심각하여 먼지까지 많이 먹기도 했다.  


커플 가족단위의 방문객들도 많았다. 특히 중년 여성으로 구성된 계모임으로 추정되는 분들이 여럿 보였고, 나이가 많으신 노부부도 눈에 띄었다. 외국인들도 많았다. 입장료는 1,000원이었는데, 강남구 주민에게는 할인 혜택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유유히 산책하며 친구들과 떠드는 여성분들을 보고 있자니, 주말인 오늘도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 우리 엄마가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왕릉안에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자, 문화재청에서는 천막 텐트 같은 것도 제공하고 있었다. 빌딩 숲에서 이런 공간 하나쯤은 필요한 것이겠지. 숲멍향멍이라고 되어있었는데, 나는 혼자 간 터라 천막에 앉아서 쉬기는 좀 애매해서 그냥 사람들이 누워서 노는 것을 구경했다. 



먼지가 심해서 컥컥거리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핸드폰 배터리가 다 닳아 버렸다. 폰이 꺼져서 산책을 종료할 때쯤은 엄마와 연락이 닿지 않아 무작정 입구에서 기다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래도 거의 매 주말마다 일하는 내가, 이렇게 황금주말에 잉여로운 시간이 주어졌으니 이건 꼭 누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 해야 할 일에 쫓기다시피 해서 항상 방구석으로 들어가 책상머리에 앉아야 하는 일상이 끝난 자리엔, 이렇게 사람들이 뭐하고 사는지 볼 시간과 기회가 들어차고 있으니 '지금을 즐겨라'.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왕릉을 샅샅이 걷고 나니 총 1시간 반이나 걸렸고, 약 8 천보를 걸어 다닌 셈이다. 음악을 듣고 걷게 되면 덜 지루하고, 운동하는 맛은 있지만 음악 없이 숲소리와 약간의 사람들 소리만 있으니 진정한 사색이 가능한 것도 같다. 사색이 너무 길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이제 몸을 움직여라. 올 해를 3달 앞둔 나의 소심한 다짐을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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