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다가 "고통이 아니라 경험에 집중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라는 구절을 만났다. 지난 10년간 나조차도 왜 그토록 운동에 집착 아닌 집착을 했던 건지 정리하기 힘들었는데, 이 부분을 읽어 내려가면서 오랜 시간 가졌던 의문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됐다. 적어도 나에게는 운동이 매일의 경험에 집중하게 하고, 이를 반복할수록 고통을 서서히 잊게 해 줬다.
서른 살,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인생이 소용돌이쳤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 그리고 연이어 암선고를 받고 2년 되던 해 돌아가신 아빠.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맞나 싶게 현실 같지 않았던 현실.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가족을 떠나는 비극을 다룬 TV드라마나 영화, 그것도 아니면 사회면 뉴스에서나 볼 줄 알았던 이야기들이 예고 없이 일상을 집어삼킨다. 어릴 적 가끔 정말 나쁜 꿈 속에서나 꾸었던 이야기들을 매일 마주하게 되는 것은 미리 준비할 수 없던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불행이 나에게만 있던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둘러보니 너무나 크고도 작은 불행들은 세상에 더 많았다. 다만 그저 묵묵히 참고 버티는 사람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 뿐.
오늘 아침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를 걷다가, 갑작스러운 불의의 사고로 4명의 사람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20대 예비신부의 뉴스를 보게 되었다. 딸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와 남동생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러닝머신 속도를 올려 땀이 날 때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영화보다 더 아픈 고통 속에서 하루를 더 살아내기 위해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건혜(27)씨는 결혼을 앞두고 스노우쿨링을 하다 뇌사상태에 빠져, 4명을 살리고 떠났다
요즘도 어떤 하루는 너무 힘들고 고될 때가 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마냥 축 처지게 된다. 도무지 나를 일으킬 수 없고, 삶이 더 나아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시간을 축내고 있는 일도 빈번해진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는 이 방법이 나쁘진 않다. 솔직히 말해서 내 몸뚱이는 타고나길 게으르고 나태하다. 그런데 문득 오늘 이 하루가 이곳을 먼저 떠나간 이들을 대신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땐 새삼 지금의 삶이 너무 값지게 느껴져 전혀 뛰고 싶지 않았던 주저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신기하다. 언제 축 가라앉았냐는 듯, 금세 운동화만 대충 꺾어 신고 어디론가 나가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 말이다. 그럴 땐 몸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달리는 것 같다. 고통이 마음을 지배할 때, 가장 쉬운 경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수년간의 경험이 알려준 것은 팔다리를 움직이고 나면, 몸에 열을 내서 휘적휘적 걷다 보면 그럭저럭 버틸만해진다는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꽤나 괜찮아진다는 것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운동하면서 땀을 내고, 씻고 나서, 우선은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잘 견뎌내고 있다는 신호를 준다. 누군가 슬픔은 수용성이라고 했다. 퇴근 무렵 이미 어두워진 창문을 보며, 차갑고 무거워진 공기를 느끼며 같이 내려앉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