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탁이 있어'
'뭔데?'
'나, 하루만 휴가 좀 다녀오자'
휴가가 절실한 어느 날, H에게 이야기했다. H는 가고 싶은 날을 선택하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24일 수요일쯤이 좋겠노라고 이야기했다. 수요일이 되기 삼 일 전부터 괜한 즐거움이 몰려왔다. 직장에서 휴가를 앞둔 일주일 전부터 일이 더 잘되었던 느낌,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설거지도, 청소도, 이유식을 만드는 것도, H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너무나 즐거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토록 간사한 것이다. 하하)
이번 주 최악의 한파가 찾아올 거라는 뉴스가 있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휴가라는 게 그랬다. 날씨가 어떻건, 만날 사람이 있건 없건, 그저 즐거운 그런 날. 일주일도, 열흘도 아닌 단 하루의 휴가인데도 불구하고 설렘이 가시지 않았다. 육아와 함께 스케일 참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갈까, 무엇을 먹을까.. 오랜만에 나를 위한 고민에 한껏 기대가 되었다. 삼청동을 가서 칼국수를 먹을까, 명동교자를 가볼까, 아니지. 이럴 때 신나게 쇼핑이나 좀 해볼까, 영화를 볼까.. 하지만 화요일 저녁이 되자 문득 미드미가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혹시라도 나를 찾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과 함께.
나를 잘 아는 H는 수요일 아침부터 호들갑이었다. 오늘 그래서 어딜 간다고? 재밌게 잘 다녀와, 라는 당부와 함께 내쫓듯 집 밖으로 밀어냈다. 밖으로 나서자 겨울 날씨에 대번에 코가 시렸다. 숨을 쉴 때마다 콧속 수분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의 하루 휴가 동안 하고 싶은 걸 적었다. 총 다섯 가지가 떠올랐다.
1. 허리디스크 물리치료를 받으러 갈 것
2. 걷고 걷고 또 걸을 것 / 나는 걷는걸 엄청나게 좋아하는 편이다.
3. 미드미 옷이 아닌 내 옷을 살 것
4. 점심을 맛있게, 천천히 먹어볼 것. 특히 뜨거운 국물이 있는 면 음식!
5. 생각의 정리
먼저 집 앞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평소에는 언제 끝나나 초조해하며 연신 시계를 보게 됐었는데, 휴가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꽤 여유가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따뜻한 침대에 누워 웹툰을 보며 물리치료를 받는 지루함이 참 좋았다. 귤이라도 옆에 한 바구니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겠다고 생각했다. 옆 침대 커튼 사이로 곤히 누워 얕은 코를 고는 고된 모습의 아저씨가 어렴풋이 보였다.
병원을 나와 버스정류장에 섰다. 추위가 너무 매서워서인지 버스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이 고장 나 있었다.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어마어마한 추위 사이로 햇빛이 참 좋았다. 오랜만에 공기도 깨끗한 것 같았다. 그저 만만한 홍대 앞에 내렸다. 젊음의 거리답게 여기만 공기가 약간 핑크빛이 도는 느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도 많았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며 괜스레 '나 아줌마 티 많이 나나?'라고 되물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십 대, 이십 대 친구들이 즐겨 입을법한 옷을 파는 곳이었다. ‘그래, 난 오늘 휴가니까.’ 옷 몇 벌을 입어보았다. 젊은 옷들 사이로 내 옷처럼 보이는 옷 두어 벌을 골라 계산했다. 근 십 개월간 니트 한 벌 산 게 다니까 이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계산대 판매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교환, 환불이 불가한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으레 하는 이야기일 텐데, 걱정이 섞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건, 단지 내 기분 탓일 거라고 믿기로 했다.
해가 좋아 여기저기를 걸었다. 추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미드미가 간간히 생각나긴 했지만 기특하게도 그때마다 H에게서 사진이 전송됐다. 한참을 걷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그동안 미드미를 데리고 먹을 수 없었던 일본 라멘을 골랐다. 십 분 안에 식사를 끝냈던 각박함에 질려 천천히 먹었다. 일본 라멘이 이런 맛이었었나 싶을 만큼 맛있었다. 무엇보다 오늘 먹은 라멘의 맛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을 기억하며 여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큰 축복이 아닐까.
복귀 전까지 세 시간 남짓 남은 이 시점. 오랜만의 여유가 어색하지만 한없이 좋기도 하다. 삼청동도, 명동교자도, 백화점도 가지 못했지만 참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든다. 재충전의 기운으로 또 멋진 엄마의 직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