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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i May 26. 2016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쇼미더지랄맘 배틀 중 어느 관람객의 자기 반성

나는 세상 엄마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내 엄마처럼 천상 '엄마'인 줄 알았다. 구수한 밥 내음, 통통통 치는 도마 소리,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소리로 아침을 깨우는 사람. 자식들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본인의 욕심이란 억누르거나 그걸 가지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은 사람. 본인의 배움이 짧음을 부끄러워 어디 나서질 못하고 자식에게 꿈을 투영하기도 하는 그런 사람. 인기 있었던 드라마 "엄마를 부탁해"에서 고두심이 연기했던 그런 엄마. 내 엄마가 그 드라마를 보며 그렇게 조용히 울었던 것은 본인의 모습을 그 드라마에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 엄마는 너무 '엄마' 그 자체여서, 난 다른 엄마들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엄마가 있었다.


가끔 '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지랄 맞아' 배틀이 벌어지곤 하는데, 난 거기에 어떻게 끼어들 수가 없다. 어느 엄마는 세상 곱게 자라셔서 나이가 드셔서도 '공주짓'을 하고 계신다. 그분은 예쁜 외모지만 성격은 지랄 맞아서 어느 새로운 그룹에 들어가면 한 달 안에 왕따를 당한단다. 또 어느 엄마는 누군가 자기에게 안 좋은 말을 하면 아빠와 딸 아들에게 전화를 열백번씩 하면서 눈물로 호소하고, 안 좋은 말을 한 사람은 자기를 음해하려는 '나쁜' 사람이 된다고. 어느 엄마는 외국 여행 두 달 가고 싶은데 한 달밖에 못 가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 한다. 어느 엄마는 차가 사고 싶으니 자식에게 돈을 내놓으라 하고 자기가 주식 하라고 맡긴 돈은 리스크를 감당하진 않고 원금을 내놓으라 한단다. 어느 엄마는 어디 좋은 풍경을 발견하면 어설픈 모델포즈로 서서 '사진 찍어'라는 무언의 압박을 수도 없이 가한다 한다. 귀가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미친 듯이 전화를 걸어대다가 전화를 받으면 "어디야!" "엘레베....(이터)"라고 대답도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린다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내 말한 틈은 주지 않는다고. 여기 엄마도 이러이러하고, 저기 엄마는 또 저러저러하다고.


쇼미더지랄맘 배틀이 한창 벌어지다 보면, 알고 보니 외할머니도 그랬어!! 라며, 이제 나도 그렇게 될 거야!! 사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어서 공포스러워!!라는 고백까지 이어진다. 이 배틀이 한 시즌 5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 와중에 나는 새로운 문화충격에 휩싸인 조용한 관객이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욕망에 충실한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내 엄마는 안 그랬으니까. 적어도 그렇게 안보이고 지금까지 살아왔으니까. 해외여행이라야 최근에 아빠 동료 부부들과 동반 여행 다녀온 정도. 운전은 배웠지만 차는 꿈도 꾸지 못하는. 좋은 곳에 가면 어색하게 서서 사진을 찍고 쑥스러운 듯 나오는. 어디 가서 나쁜 소릴 들으면 나에게 쏟아놓긴 하지만 왠지 조용히 눈물로 삭히는. 잔소리 잔소리 끝에 걱정이 묻어나는. 어딜 가더라도 다른 누구를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나도 내 엄마의 지랄 맞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할 얘기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딱히 없었다. 엄마와 내가 엄청 사이좋은 모녀라서가 아니라, 내 엄마는 뭔가 모범적인 '엄마', 정말 '어어어어어엄마아아아아아아'라서, '전형적인' '엄마'로서의 지랄 맞음 외에는 나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아빠에겐 보였을까. 동생에겐 보였을까. 누구에게 보였을까. 생각해보면, 외할머니도 그랬던 것 같다.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가 간혹 얘기하는 엄마의 엄마는 내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내 엄마보다 더 '어어어어어어어엄마아아아아아아아아'인 것 같다. 예엣날 엄마. 내 엄마는 엄마.


내 엄마라고 하고 싶은 게 없을까. 가고 싶은 곳이 없을까. 갖고 싶은 것이 없을까. 멋진 풍광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까. 속 얘기를 다다다다 쏟아내고 싶지 않을까. 내 엄마는 그게 없는 걸까 아니면 그런 걸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져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형편이 안되니까. 돈이 없으니까. 있는 돈으로는 살림해야 하니까. 애들이랑 남편 먹이고 입혀야 하니까.......라고 내 엄마의 딸은 엄마의 생각을 상상한다.


지랄 맞은 엄마들에 대한 얘기를 듣자니, 우리 엄마는 이보다 더 불쌍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마저도 엄마를 '엄마'의 틀에 가둬서 그 바깥으로 가능한 엄마의 욕망을 무시하거나 없는 것 취급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지금의 엄마가 너무나도 당연해서. 이 깨달음이 상당히 늦었다는 것에서 스스로 개탄하고 있다. 이 당연한 것을. 어째서. 이제야.


다른 엄마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 엄마들의 '지랄 맞음' 때문에 주변인을 힘들게 한다지만, 본인은 본인의 욕망을 표출하고 원한다고 얘기하고 획득하지 않는가. 그 엄마들도 힘겨움이 있고 고통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 감정과 본인의 마음에 솔직한 편 아닌가. 우리네(?)가 엄마란 존재에 기대하는 어떤 인내하는 여성상과는 다르게 그들의 삶을 살지 않는가. 아직 엄마가 '엄마' 그 자체이길 바라는 것은, 한때 여성의 히스테리(?)를 정신병이라 여겼던 전근대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형성을 강요하는 억압은 아닐는지. 내가 그 억압자였다.


나아가 엄마를 딸이 닮아가고 그 딸이 또 닮아간다면, 난 엄마처럼 될 것인가, 혹은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이미 어느 부분에서는 그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워 상당 부분 내 엄마를 반영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낀다. 하지만 또다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결혼에 대해서 엄마와 얘기를 했을 때, 난 결혼도 싫고 애 낳기도 싫다고, 엄마 앞에서 한참 열변을 토했더랬다. 엄마는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넌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거니?"라고 물었다. 난 내가 결혼과 출산으로 얻을게 없고 잃을게 더 많은 거 같은데 그러고 싶지 않노라고, 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 내 엄마는 나를 키우며 내 동생을 키우며 행복했나 보다. 엄마는 그 행복을 나도 느꼈으면 싶나 보지만, 나는 싫다 했다. 딸 아들을 위해 살아가는 엄마가, 엄마는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그건 엄마 고유의 욕망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혹은 엄마가 내 상상과 달리 정말 온전히 행복했다 하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내 고유의 것이고, 내 스스로 내가 찾아 세우는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누구 때문에 내 것을 죽이고 싶지 않다. 아직은 그렇다.


엄마를 사랑하고 존중하지만,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지랄 맞게' 살아서 혹시 말년이 불행하더라도 난 그렇게 살아야겠어. 우리 엄마 겁나 불쌍해,라고 생각하는 오늘의 나와 같은 딸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아. 아직 난 내 욕망이 무엇인지, 내가 찾고자 하는 행복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찾아갈 거야. 그건 아무래도 엄마와는 다른 방식이고 다른 형태인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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