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로. 다시, 처음부터.

by 라니

얼굴 44반, 몸 66반 그녀는 어떻게 되었나?

다시, 처음부터

결국 나는 53kg는 되지 못했다.

목표했던 '53불고기'는 실패했지만, 10년 전 몸무게 55kg로 돌아왔다. 6kg를 내려놓았고, 주 4회 운동이 당연해졌으며, 공복 14시간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44세 안에 이 살을 쇼부 보겠다던 다짐은 45세 구정 전까지의 데드라인에 안착할 수 있었다. 구정 전에 감량한 이 6kg는 그 어떤 숫자보다 다행인 마음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단순히 살을 뺀 게 아니니까.



보라색 할머니 군단들이 보여준 것

경주 여행 때 불국사에서 만난 보라색 스타일링 할머니 군단.

"와 언니 저기 봐요! 보라색 롱패딩 입은 할머니 두 분!
너무 예쁘다~ 우리도 저렇게 나이 들자~!"


색감이 예뻐서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는데 그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동행한 언니한테 우리들도 저렇게 담엔 옷 색깔 맞춰 입고 여행 오자!라고 말하던 찰나 그 뒤에 보라색 입은 할머님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쨍한 보라색 롱패딩, 치마, 재킷, 망토, 모자, 머리끈, 티셔츠, 심지어 염색까지. 그분들은 그냥 여행 온 게 아니었다.


함께 나이 들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다.


"어르신, 너무 아름다우세요."

내가 건넨 말에 지그시 웃어주시던 그 할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도 저렇게 살 거라는 걸.

친구를 소중히 하고,
내 모습을 예쁘게 가꾸고,
운동과 산책을 게을리하지 않고,
서서히 켜켜이 잘 쌓은 삶을 누군가와 계속해서 함께 나아가는 것.


나이 들어도 친구들과 옷 맞춰 입는 여자처럼. 명랑하고, 그 가운데 품격이 느껴지는 여자.




살을 빼다가, 나를 만났다

살을 빼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나를 알아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서른에 직장을 박차고 나와 옷가게 사장님을 꿈꿨던 나. 허벅지에 딱 떨어지는 숏치마에서 아방가르드한 박시한 옷으로 취향이 바뀐 나. 옷가게 사장님들과 친해져 즉석에서 사진을 찍던 나. 친구들과 드레스코드 맞춰서 노는 걸 즐기던 나.


그 모든 나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맞다! 나 이런 거 좋아했네~ 그러네~!"




45세,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기분

2026년 45세가 되고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롭다.

이건 마치 큰 폭풍 전야 같은 느낌이랄까. 걱정했던 마음이 설렘으로 바뀌는 순간.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하지만 두렵지 않은 그런 기분.


"얼굴 44반, 몸 66반"이라는 말로 시작한 이 여정.

얼굴 사이즈는 44반이지만, 재킷을 오픈하면 거대한 반전 몸 66반 사이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하고 있는 나. 목표에 미치진 못했지만, 10년 전 몸으로 돌아온 나. 숫자는 아직 부족하지만, 매일 운동하고 공복을 지키는 내가 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기분의 나다.


방심하면 한순간에 훅 갈 수 있다는 걸 안다. 식단과 운동을 놓기는 너무 쉽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러다 살찌면 또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것도. 예쁜 원피스를 장바구니에 담아뒀다. 음주를 주 1-2회로 줄일 마음도 하고 있다. 주 4회 운동은 이제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다시, 제로. 다시, 처음부터.


다이어트를 하면서 다짐했다.

단순히 살이 아닌, 나를 단장하고 가꾸면서 그 너머의 멋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그 확신은 이제 상상이 아니다.


진짜가 되어가고 있다.
45세의 가뿐한 삶.
나를 응원하는 가족과 내 사람들.
함께 나이 들어갈 친구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보라색 옷을 맞춰 입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그날의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


나이를 먹고 더 좋은 건, 자유 시간 확보에 유연해졌다.

영감이 생기면 궁금해서 해보고 싶다. 해내고 싶은 일을 혼자도 좋지만 시너지를 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주변의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챙긴다.


결국 얼굴 44반, 몸 66반 그녀는




살을 빼면서, 자신을 다시 살렸다. 그리고 지금, 40대 중반의 문턱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이 설렘을 안고
서 있다.


다시, 처음부터.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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