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외로움을 너무 쉽게 문제로 규정한다. 외로움을 느끼면 뭔가 잘못된 것 같고, 성격에 문제가 있거나 인간관계가 부족하거나 삶이 어딘가 비뚤어진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빨리 없애야 할 감정처럼 취급한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취미를 만들거나, 관계를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외로움은 꼭 고쳐야 할 병이라기보다 어떤 신호에 가깝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삶의 국면에 들어와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 말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실존이라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생존이 문제인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삶에는 서로 전혀 다른 층위의 고민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늘의 끼니와 내일의 일자리가 더 중요한 문제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내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더 큰 질문이 된다.
그래서 생존이 문제인 사람은 사실 실존이 문제인 사람의 고민이나 행동, 우울을 이해하기 어렵다. 먹고 사는 문제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에게 “나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은 사치처럼 들릴 수 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질문을 할 여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실존이 문제인 사람은 생존에만 혈투를 벌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왜 그렇게까지 삶을 밀어붙이며 살아야 하는지, 왜 자신의 삶을 돌아볼 틈조차 만들지 않는지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긴다. 생존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는 때때로 실존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들의 말과 태도 속에서 자신의 고민이 가볍게 취급되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은 자신의 자아나 자존이 공격당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반대로 생존의 싸움을 치르는 사람들은 실존의 고민을 하는 사람을 보며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삶의 좌표가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금 생존의 단계에 서 있고, 어떤 사람은 실존의 단계에 서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종종 이 지점에서 찾아온다. 내가 던지는 질문을 이해해 줄 사람이 주변에 없을 때, 내가 서 있는 좌표를 함께 바라봐 줄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관계가 부족해서라기보다, 내가 서 있는 삶의 층위와 주변의 삶의 층위가 어긋나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외로움은 없애야 할 병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어떤 삶의 단계에 들어와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들과 연결될 때 비로소 이해받을 수 있는지를 조용히 알려주는 신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