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키우는 중입니다 中
스스로 삶을 개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욕망을 타인을 통해 실현하려고 한다. 특히 직업이 없던 여성일 경우 보통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 부를 이루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갓 취업했을 때, 나는 엄마에게 매달 용돈을 드리지 않았다. 그 대신 취업기념, 명절 기념, 생신, 크리스마스 기념 이런 기념일 식으로 용돈을 챙겼다. 그렇게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엄마에게 매달 용돈을 드리는 행위가 곧 내 발목의 족쇄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받는 거에 익숙해지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용돈을 드리면, 그것이 당연해지고 안 주는 게 죄악시될 것이 뻔하였다. 그렇게 '용돈'에 속박되는 시작 자체를 하지 않으려 나는 부단히 머리를 쓴 것이었다. 자식에게 돈을 바라지 않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바라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에게 돈을 바라지 않아도 자식이 먼저 용돈 드리고 집안을 일으키려는 마인드가 있는 게 가장 아름다운 관계일 것이다. 우리 엄마는 내가 매달 용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말 차갑고 매정하다고 했었다. 이래서 아들을 낳았어야 했다고 말이다. 대개 아들들은 잘 나가면 집 사주고, 그렇지 않더라도 용돈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키워준 부모에게 헌신한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인생에 대한 푸념과 화풀이를 나에게 하는 것이란 것은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들고 있는 화살의 무게와 날카로움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낳은 자식한테 던지고 퍼부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엄마와 다 큰 자식의 관계에서는 가끔 자식이 엄마를 가르치려 할 때도 생기고, 엄마의 모든 것을 헤아리지 못해 분노를 살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그때마다 서로에게 던져도 되는 화살의 무게와 크기는 정해져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분노가 잘 일으는 사람일수록 내가 쏘아대는 화살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잔인한 크기인지 잘 모른다. 그냥 자기감정에 취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큰 화살에 맞아, 그 순간만큼은 나를 낳음과 나를 키움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자식이 먼저 부모님한테 금전적으로 베풀고 싶게 하려면, 도대체 그 부모는 얼마나 훌륭한 삶이었을까 싶다. 경제력을 떠나서 자식이 부모를 얼마나 공경하고 얼마나 애틋하고 안타깝고 감사했으면, 내 인생을 희생하여 부모에게 헌신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나도 엄마가 그런 의미의 사람이었다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애틋하고 따뜻하고 사랑하고 감사한 대상이었다면, 부모님에게 내 돈을 헌신하는 것이 뭐가 어려웠을까. 하지만, 그러한 애틋한 마음은 아주 어린 유년시절 후로는 갖기가 어려웠다. 부모가 잘하지 않아도 아이의 마음에 자연히 있는 그 '사랑'을 계속 애틋하고 따뜻하게 데워줘야 하는, 계속 유지시켜 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부모의 무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