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삶으로 남긴 단점, 감정조절의 부재

by 랭크작가

엄마는 촉이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는 순간을 알아챘고, 말 한마디에 섞인 진심과 무례를 정확히 구분했다. 누가 선을 넘었는지, 어디서 관계의 온도가 달라졌는지를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예민함이 아니라 감각이었고,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 촉은 늘 좋은 평가로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민감했고, 그 민감함은 곧 과민으로 보였으며, 느낀 것을 곧바로 쏟아내는 급흥분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은 엄마의 이미지는 ‘촉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욱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엄마가 틀린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엄마의 판단은 맞았다. 무례한 사람은 정말 무례했고, 상황은 정말 부당했다. 다만 엄마는 느낀 것을 천천히 소화하거나 말로 풀어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감정을 감지하는 속도는 너무 빨랐는데, 그 감정을 조절하고 언어로 바꾸는 통로는 배우지 못한 채였다. 자극이 들어오면 생각과 설명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반응이 나갔고, 그 결과 사람들은 내용이 아니라 태도만 기억했다. 맞는 말은 사라지고, 강한 표정과 높은 목소리만 남았다.


이걸 흔히 ‘욱하는 성격’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본질이 아니다. 욱함은 성격 결함이 아니라 결과였다. 핵심은 정서 자극을 처리하는 구조에 있었다. 엄마는 정서 민감성이 높았지만, 그 민감함을 안전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감정은 느끼되 어떻게 멈추고, 어떻게 설명하고, 어디까지 표현해도 되는지를 가르쳐주는 환경이 없었다. 그래서 뇌는 가장 빠른 방식, 즉각적인 반응을 선택했다. 그게 유일한 방어였기 때문이다.


어른 역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곤 한다. 흥분하면 멈추지 못하고, 사과나 복구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모습은 아이에게 강력한 학습이 된다. 감정은 이렇게 나오는 거구나, 멈추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그렇게 ‘욱함’은 나쁜 습관이 아니라 기능이 된다. 상황을 멈추게 하고, 상대를 물러서게 하고, 나를 보호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엄마는 과민했던 게 아니라 혼자였고, 급흥분한 게 아니라 설명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그 맥락을 보지 않는다. 결과만 본다. 그렇게 엄마는 ‘맞는 말을 하지만 함께 있기 힘든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자랐다. 민감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느끼는 게 빠르면 이렇게 외로워지는구나를 배웠다. 그래서 엄마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같은 감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제는 안다. 이 감각을 없애야 할 결함으로 볼 게 아니라, 다시 훈련해야 할 미완의 능력으로 봐야 한다는 걸. 촉은 유지하되, 반응은 늦추고, 분노 이전의 감정을 말로 꺼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감각은 짐이 아니라 힘이 된다. 엄마에게 없었던 그 중간 단계를, 나는 지금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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