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가 너무 부러운 중산층의 마음

by 랭크작가

나는 중산층이라는 가정아래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껏 안심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은 위치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를 본다. 그리고 늘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올라온다. 솔직히 말하면 출발선이 다르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은 순식간에 계산을 시작한다. ‘나라면 저 조건에서 훨씬 더 행복할 텐데.’ ‘나라면 저 정도 기반만 있어도 진짜 최선을 다해서, 내 삶을 예쁘게 운영하면서 살 자신 있는데.’


그런데 또 한 장면이 따라온다.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모습. 그러면 머리가 멈칫한다. 왜 저렇게 힘들어하지? 저 정도면 편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다 다시 마음이 비틀린다. 조건이 다르면서도 고통은 똑같다면, 도대체 이 비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기서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건 ‘조건’만이 아니라는 것. 내가 금수저를 보며 상상하는 행복은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행복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 기준으로 그들의 삶을 편집한다. 그들에게는 이미 기본값이 된 것을, 나는 여전히 꿈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 쉽게 말한다. 나라면 저 조건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중요한 누락이 있다. “저 조건에서”라는 문장 뒤에 붙는, 그 사람만의 목표와 기준과 불안이 빠져 있다.


사람은 절대값으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보다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간격에서 생긴다. 중산층인 나는 ‘경제적 안정’ 자체를 목표로 삼을 수 있다. 매달 고정비를 걱정하지 않는 것, 갑작스러운 병원비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것, 아이 교육비 때문에 잠을 설치지 않는 것. 나에게는 이게 ‘안전’이고, 안전이 확보되면 비로소 숨이 트일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금수저에게 경제적 안정은 목표가 아니라 바닥이다. 그들에게 ‘안전’은 이미 주어진 조건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향하는 목표는 어디로 이동할까. 어떤 금수저는 ‘자기 증명’이 목표가 된다. 돈이 많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지 않으려면, 더 뛰어나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어떤 금수저는 ‘관계의 진짜성’을 목표로 삼는다. 나를 좋아하는 건 내 사람인가, 내 배경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어떤 금수저는 ‘유지’가 목표가 된다. 잃을 게 많은 사람에게 삶은 확장보다 관리가 된다. 어떤 금수저는 ‘상속 받은 판을 내가 망치면 어쩌지’라는 불안을 안고 산다.


은수저와 동수저는 또 다르다. 은수저는 올라갈 수 있다는 감각과 내려갈 수 있다는 불안을 함께 가진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있지만, 완전한 안전은 아니다. 그래서 목표가 ‘성공’과 ‘안정’ 사이에서 갈라진다. 한쪽은 더 높이 올라가고 싶고, 다른 한쪽은 지금 가진 걸 지키고 싶다. 동수저는 생존과 회복이 목표가 되기 쉽다. 당장의 생활을 유지하고, 가족을 책임지고, 앞으로의 불확실성을 견디는 것. 이 구간에서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작은 평안 하나가 큰 성취가 된다.


그런데 나 같은 중산층은 특이한 위치에 선다. 위도 보이고 아래도 보인다. 그래서 감정이 복잡하다. 위를 보면 부럽고, 아래를 보면 불안하다. 나는 충분히 가진 사람을 보며 ‘나라면 저걸로도 행복할 자신 있다’고 말하고, 동시에 나보다 더 낮은 누군가는 나를 보며 똑같은 말을 할지도 모른다. ‘나라면 저 정도만 돼도 행복할 텐데.’ 그걸 아는데도 감사가 쉽게 생기지 않는 이유는, 감사가 논리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사는 안전감이 있을 때만 자연스럽게 나온다. 마음이 여전히 “더 올라가야 한다”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경보를 켜고 있으면, 뇌는 아래를 보며 따뜻해지기보다 위를 보며 긴장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자주 하는 그 문장을 다시 바라본다. “나라면 저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 자신 있는데.” 이 문장은 한편으로는 욕망이고, 한편으로는 자기 효능감이다. 나는 삶을 운영할 자신이 있다는 믿음.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저 사람의 조건일까, 아니면 내가 상상하는 ‘안전한 상태’일까. 그리고 그 상태는 정말 돈만으로 가능한 걸까.


각자만의 목표는 생각보다 세세하게 다르다. 누군가는 생존이 목표고, 누군가는 인정이 목표고, 누군가는 관계의 진짜성이 목표고, 누군가는 유지가 목표다. 목표가 다르면 고통의 모양도 다르다. 그리고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의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은, 사실 내가 그 사람의 목표를 상상하지 못했을 때 생긴다.


비교는 멈추기 어렵다. 인간은 원래 위를 보며 달리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다만 비교가 나를 갉아먹는 순간, 나는 한 가지를 떠올리려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니 ‘감사하지 못하는 나’를 책망하기보다, 지금 내 마음이 안전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먼저 들여다보는 편이 낫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진짜로 붙잡고 싶은 결론이 있다. 조건이 다르면 목표가 달라진다. 목표가 다르면 불행의 기준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남의 목표로 내 삶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내 목표를 더 분명하게 세우는 일이다. 비교가 끝나지 않는 이유는, 내 기준이 아직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삶의 목표가 선명해질수록 남의 조건은 덜 크게 보일 것이다. 부러움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를 흔들 만큼의 힘은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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