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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테라피스트 R Oct 22. 2019

페북을 보다가  밥 숟가락을 내려놓은 이유

관음증과 열등감


여러분은 혹시, 어느 날 오랜만에 SNS에 접속하면서 친구의 페북 페이지를 훑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1시간이 훌쩍 넘었던 기억, 있으신지요?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단조롭기만 저의 일상에 비해 온갖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듯한 친구의 삶은 왜 그리도 폼나 보이는지요. 때로는 저의 모습은 감춘 채 은밀하게 다른 이들의 삶을 엿보는 과정이 짜릿하기도 하구요. 이는 일종의 ‘관음증’이 선사해주는 쾌감이기도 합니다.


‘관음증’은 종종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 <사이코> 등의 작품들이 바로 이 관음증 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관음증은 본래 성적 쾌락을 부정적으로 취하는 정신 병리 차원에서 접근되었지만, 그의 영화들로 인해 관객의 태도를 평가할 때 일상적으로 적용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담는 스크린도 하나의 창이기에,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어두운 공간에서 배우들의 공간을 엿봅니다. 이는 비단 성적인 내용이 아니라고 해도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사진출처: pixabay.com)


이처럼 예전엔 영화 스크린에서 타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라고 한다면 디지털 시대인 요즘에는 그 스크린이 퍼스널 컴퓨터와 모바일 화면으로 바뀌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컴퓨터와 모바일로 인해 누구나 ‘관음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라보는 대상의 폭도 그만큼 넓어졌는데, 개인의 사생활이나 개인정보 대부분이 여과 없이 관음증의 충족 대상이 되었습니다.


SNS를 통한 네트워크의 확장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 생활의 편리성을 높이고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SNS 네트워크로 형성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그 속에서 관계적 구도를 형성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는 그야말로 ‘관계의 집합체’라 할 수 있지요. 한 사람이 SNS로 만들어 낸 네트워크는 그 사람의 자산이 됩니다. 더 나아가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도 연결될 수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네트워크의 ‘밀도’와 방향성입니다.




우선 네트워크의 ‘밀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밀도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밀도의 영향을 받아 작물의 생장에 차이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밀도가 높아질수록 작품의 평균성장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새 우리 사회의 네트워크 밀도는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야말로 개개인 간의 거리가 참 좁아졌습니다. 예전엔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6단계만 건너가면 모르는 사람까지도 알게 된다고 하였던가요. 요즘에는 2-3단계만 넘어서면 금세 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걱정스러운 점은 네트워크 밀도의 증폭은 자칫 구성원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개인과 개인의 거리가 밀접하고 좁기에 자칫 개인의 사생활이나 개인 정보, 인권 침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집단적 관음증’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음증적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인터넷 행위들이 폭증할 가능성이 큽니다. 구성원들이 서로 가늠할 수 없는 상호 행위들을 일으킬 수 있고 이는 네트워크의 붕괴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네트워크의 방향성입니다. 

앞서 이 시대에는 네트워크가 ‘사회자본’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건강한 ‘사회자본’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성’입니다. 사회자본은 사회적 신뢰와 호혜의 원리에 따라 인간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를 위해서 그 안에 몸담고 있는 개인과 집단은 신뢰, 용서, 관용 등의 덕목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네트워크의 방향성이 오로지 타인과의 ‘비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에는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는 유독 타인과의 ‘비교’, 타인의 ‘평판’에 민감합니다. 직장생활을 하건 사회생활을 하건 한 사람에 대한 주위의 평가로 인해 많은 부분이 영향을 받지요. 오래된 유교적인 사고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 평판을 위해 자신을 제3의 가상 인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 안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열등감이라는 그림자를 감추고 말이지요. 실제적인 공동체 - 직접 만나고 얘기나누고 접촉하던 공동체와는 점차 멀어지고 가상의 공동체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열등감이 의식 위로 올라오는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열폭(열등감 폭발)’에 뚝 떨어져버리는 자존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 시즌3 중 1화 <추락>에서는 ‘관음증’과 열등감의 미묘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보면,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가 삶을 전반을 좌우하고 있는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서로에게 점수를 매깁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점수를 주는데요, 그에게 점수를 주기 위해 먼저 SNS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사회적 평판을 살펴봅니다. 점수를 늘릴수록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납니다. 더 많은 자산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넵니다.


주인공인 레이시의 점수는 4점대 입니다. 결코 낮은 점수는 아니지만 더 좋은 집, 더 좋은 혜택을 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점수대의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점수 교환에서 큰 향상을 꾀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녀에게는 나오미라는 4.8점 대의 상류 클래스 친구가 있는데요, 어느 날 나오미에게서 신부 들러리를 서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점수를 높이기 위해 기꺼이 허락을 한 레이시. 하지만 이후 상황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갑니다. 동생과 의견 차이로 싸우게 되고, 지나가다 커피를 쏟는 등 점점 점수를 깎아내리는 일만 겪습니다.


이미 깎여버린 점수 때문에 비행기도 못타게 된 레이시는 우여곡절 끝에 나오미 결혼식장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친구 나오미는 엉망진창의 몰골을 지닌 레이시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고 참다못한 레이시는 품어왔던 욕설을 퍼붓다가 결국 구치소에 갇히고 맙니다.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점수는 포기한 채로 말이지요.



어느 때부터인가, 사회적으로 이러한 거짓된 관계, 포장된 미소가 늘어난 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 원인으로 ‘집단적 관음증’과 네트워크의 지나친 촘촘함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가 있는 건 아닐런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상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사이를 메우지 못하고 상처만 남긴 채 ‘추락’하고 마는 건 아닐러지요.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홍대선, 푸른숲, 2018)에서는 수많은 규율과 제약에 던져진 한 인간이 어떠한 경험의 축적으로 관습을 탈피하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 삶을 결정하기 위한 너무나 많은 선택지 안에서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규율로부터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지켜나갈 것인지.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수 있을지, 그리고 이 불안의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나’를 찾는다는 것은 왜 중요한지. 한 번쯤은 조용히 시간내어 고민해 봄직하지 않을런지요.


그런 시간이 조금씩 쌓여갈 때, 더 이상 페북을 보다가 밥맛이 없어 숟가락을 내려놓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지 않을까요? (가장 먼저 저부터 실천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회자본; 네트워크, 공유된 규범, 공유된 신뢰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각각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회자본은 물리적 자본이나 인적 자본과는 달리 인간관계 내에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이종수,<행정학사전>, 대영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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