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는 '나쁜 아이'라는 편견에 대한 반박문
성연이는 예전 초등학교 사진을 보며 한숨에 잠길 때가 많다 고등학생인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의 전성기는 다름아닌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달리기면 달리기, 미술이면 미술, 학급회장도 곧잘 도맡아하던 천상 재주꾼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학교 성적으로 모든 것이 판가름난다는 현실을 접하게 된 후 예체능에 능했던 성연이의 재능은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어졌다 아니, 경쟁력에서 밀렸다고 해야 맞을런지. 국영수사과, 공부에 쓸모가 없는 재능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특히 성연이는 공부에 있어서는 습득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아니, 성연의 부모가 보기에 성연은 천성적으로 느린 성격을 지닌 아이였다. 책을 읽을 때도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으며 뭐든지 실행하기 전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그러하기에 공부에 있어서 다른 이들을 따라가기에 힘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는데도 하루에 풀 수 있는 영어, 수학 문제는 얼마되지 않았다 때문에 어느 공부든 학원에서 배우는 것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결같이 진도 따라가기에 급급한, 속도 경쟁 속에서 성연이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조금씩만 내게 맞춰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주면 좋으련만 어디에서도 성연이의 공부 속도에 맞춰주는 곳은 없었다 성연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세상에 발맞추지 못하는 낙오자처럼 느껴졌다 과연 공부를 습득하는데 있어서도 평균속도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그렇다면 성연이와 같이 평균을 따라가기 힘든 아이들은 “공부습득 속도가 늦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낙오자로 낙인지으며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흔히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논리는 공부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공부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에서 위의 전제는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키워본 부모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돌 지난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부모들은 “아이 성장의 평균치”에 대해 온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걸음이 빠른지 늦은지, 뒤집기는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말은 언제부터 시작해야하는지, 키와 몸무게 등 성장 밸런스는 어떤지 말입니다. 아이의 성장 속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어느 부모든 한 번쯤은 육아 책자를 뒤적여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육아 전문가들의 “결국 아이에 따라 성장의 속도는 다르다,는 점을 잊지말자”는 결론에 도달하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위안을 얻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이후부터 부모들의 시선은 온통 아이의 “지능의 속도”에만 집중됩니다.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배움의 속도가 느린, 성연이의 힘든 상황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시간’의 개념은 ‘기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속도’는 기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초고속 디지털 전자 문명의 시대에서 ‘속도’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빠름’을 지향하는 방향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떤 일에 목표와 성과, 현실적 이해를 중심에 둔 상태를 뜻합니다. 인간과 대상 사이에 ‘이해관계’가 주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기계의 시간 속에서 추구하는 ‘빠름’의 정체입니다.
‘공부’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지적 활동을 뜻했을 때에는 ‘공부’를 습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은 그 ‘속도’보다 ‘깊이’였습니다. 과거 제도를 보자면, 어린 나이든 혼기가 꽉찬 나이든 일정 수준의 학문의 깊이를 채우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깊이에 도달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는 직위와 혜택을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공부’는 ‘인간의 시간’이 아닌 ‘기계의 시간’에 복속되었다. ‘공부 습득의 빠름’이 ‘선한 덕목’으로 자리매김한 배경에는 인간이 기계와 경쟁 구도에 서게 된 시기의 도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글에 주목하게 되면, '빠름'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느림>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삶의 올바른 방식에 대해 고민한 밀란 쿤데라의 글입니다.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ecstasy)의 형태”이다.(밀란 쿤데라,<느림>)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했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인간은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속도는 육체를 망각하게 하고, 나를 망각하게 하여 끝내는 인간의 기계화, 인간의 비인간화를 촉진한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그렇다면, 사실상 두뇌의 기억 회로가 활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체리듬은 저속에 맞춰져야 합니다. 빨리 수행하는 데만 급급하다보면 그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기 때문에 자유로운 생각이라든지 깊이 있는 생각에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비되는 ‘느림’ 즉, slow란 말 속에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생태적(ecological)’, ‘심미적(aesthetic)’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느림’을 통해 인간은 ‘지속가능한’, ‘생태적인’, ‘심미적인’ 활동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행동’은 수행해야 할 과제를 보다 체계적이고 깊이있게 완성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생태적인 활동’은 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을 보다 인간다운 삶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끕니다. ‘심미적인 활동’은 세상과 인생을 부드럽게 관조하고 음미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을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느림’은 개인이 지닌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감각의 둔함이나 의지의 결핍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선택에 대한 가치관이자 세계관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느림은 더 넓게 보자면 개인이나 공동체의 행복과 선에 관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느린 습성이 공부하는 데 있어 반드시 고쳐야 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아이의 삶의 방식을 타고난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주변의 시선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아이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습니다. 그 후 그 아이에게 맞는 공부 방법을 제시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개별적으로 진도를 맞춰주는 시스템에서 공부하기를 권유한다든지 잘 맞는 책을 선정하여 반복학습을 하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속도에 맞춰 사는 삶은 어느덧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계적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방향성'과 '깊이'입니다.
비할 수 없이 소중한 한 아이의 삶을 타인이 만들어 놓은 잣대에 올려놓고 저울질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아이가 지닌 삶의 속도를 인정해주고 지켜봐주면 어떨까요. 그 삶에 피어날 눈부신 꽃망울이 자신의 시간에 맞춰서 움트기를 기대하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