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에게 빠진 짜장면
카톨릭-일명 천주교라고 하는데 , 천주를 믿는 종교라는 뜻.
우리가 천주교(天主敎)라고도 부르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가톨릭을 전해 받은 중국에서 하느님을 천주(天主)로 불렀고, 우리가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천주교회’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의미를 더욱 부각할 때 함께 쓰는 말이다. (from 네이버 지식백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from 마르코 복음 5장 36절)
내가 처음 울며 겨자먹기로 천주교 교리를 배울 때 뼈저리 느꼈던 "두려움"이란, 정말 말로 이루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이런 두려움의 심연속에 빠뜨린 놈은 다름아닌 , 나의 "사랑스러운" 신랑 이었다.
신랑 집안은 아주 절실한 천주교다. 우리 시어머님을 비롯해서, 시아버님, 두 아드님, 그리고 첫째 며느리님 즉 나의 형님까지 모두 할것없이 "하느님"족이다.(하느님을 믿으시니까 하느님 족이라고 내가 뒤에서 몰래 불러왔었다.) . 그런데 이상한건 우리 시외할머님은 불교 신자시란다. 그래서 옛날 시어머니와 시외할머니가 같이 사셨던 시절, 집안이 조용할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 한쪽은 시도때도 없이 "나무아미타불"타령이오, 그럼 다른 한쪽은 질세라 "전능하신 하느님" 하고 웨치셨단다. 이건 정말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우리 시외할머니 얘기가 나와서 그런건데, 이 분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시다. 올해 95세, 혼자서 5남매를 키우신 분이다.하긴 중국도 그때 그 시절엔 만만치가 않았었지. 7-8명의 자식도 거뜬히 키웠던 시절이니까. 지금처럼 아기한테 유기농을 먹이랴, 친환경기저귀를 사랴, 이랬다면 아마 엄두도 못 냈을 일이지만. 아무튼 시외할머니는 연세가 90이 되실때까지도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혼자 사셨다. 요리도 직접 하시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드신다. 목욕도 혼자 하시고, 빨래까지 손수 하신단다.
한번은 신랑과 함께 시외할머니를 뵈러 갔었는데 혼자서 빨래를 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내가 도와드리겠다고 나섰지만, 시외할머니는 극구 거절을 하시면서 직접 하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손주며느리가 왔다고 요리까지 해주셨단다.. 맛있는 된장찌개를..
또 한번은 시외할머리를 모시고 외식을 하려고 했는데, 차에서 내리고 집까지 들어가는데 20분이 걸렸다,50m도 안 되는 거리를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연세에 몸이 성하신 분도 걷기가 불편 하실테데, 거기에 등까지 구부정 하시니 얼마나 힘드실까? 내가 도와드리려고 팔을 잡아 드렸지만, 시외할머니는 끝내 나를 뿌리치고 혼자힘으로 집까지 올라가셨다 . 물론 몇걸음 가시다가 쪼그리고 앉아서 숨을 돌리셨다가 또 걸으시고, 또 앉으셨다가..여간 고집이 세신 편이 아니었다.
시외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을 보면 자꾸 생각이 나는 또 한분의 할머니가 계신다. 바로 나의 외할머니~~가 아니고, 외할머니의 친구분이시다. 어렸을 적 내가 유치원에 다녔을 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분도 허리가 많이 구부정하셔서, 난 뒤에서 몰래 "꼬부랑 할머니"라고 불렀었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길을 걷다가 꼬부랑 나무밑에서 꼬부랑 똥을 누었네. "
꼬부랑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동네 친구들이 놀려대면서 부르는 동요가 있었다. 물론 거기엔 나도 끼어있었다. 꼬부랑 할머니는 나를 무척이나 예뻐 해주셨다. 내가 유치원 수업이 끝날 때 외할머니나 엄마가 오지 못하는 날에는 , 꼭꼭 나타나셔서는 날 빈정 상하게 하셨다. 왜냐고? 등이 구부정한 노인네가 데리러 오면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꽃다운 언니나 잘 생긴 아저씨들을 한창 좋아 할 나이에 말이다. 그래서 꼬부랑 할머니가 유치원 문앞을 지키고 계실 때마다 난 뾰로통 해서 ,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앞에서 걸었다. 일부러 총총 걸음으로, 꼬부랑 할머니가 따라오지 못하게 말이다. 그리고 몰래 뒤에서 엄마에게 고자질을 해 버렸다.
"엄마, 꼬부랑 할머니 다시는 유치원에 오게 하지 마.. 창피해!"
그 때 부터 꼬부랑 할머니는 다시는 유치원에 나타나지 않으 셨던 것 같다. 지금쯤 어디 계실까? 그 할머니..생각 해보니 난 역시 어릴때부터 사탄의 화신 이었던 것 같다..
꼬부랑 할머니와 우리 외할머니는 아주 친하셨다. 왜 친한지는 나도 잘 모른다. 외할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하시면서 아신 분이라고만 들었다. 외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나는 물론 외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본적이 없었고.
외할머니는 그때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면서 보따리 장사라는 것을 많이 하셨다. 중국에선 여자가 지위가 더 높다지만, 그 시절에 여자 혼자서 장사를 한다는 건 쉽지많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웃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은 모두 외할머니를 여장부라고 부르셨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는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하루가 멀다하게 나가시는 외할머니, 오늘은 약초 캐러 산으로, 내일은 의류 도매로 *광저우나 심천(그때 의류도매 등 사업으로 가장 발달 되어 있는,또한 기회가 가장 많았던 도시중의 하나)으로 가셨었다. 그리고 어느 햇살 밝은 상큼한 아침, 나는 토실토실한 촉감에 눈을 떠보면, 품안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반겨 주는 곰돌이 인형이 누워있었다. 또 다른 날에는 아리따운 분홍 레이스 치마가, 또 어떤 날에는 눈을 깜박거릴 줄 아는 예쁜 노랑 머리 인형이.. 그 때 그 시절, 나는 같은 또래 친구들이 감히 바랄 수 없었던 예쁜 옷들이나 귀여운 인형들을 수없이 많이 받았었다. 모두 외할머니가 광저우나 심천 지역으로 가시면서 사주신 선물 이었다.
지금 생각 해 보니, 그때 나에게 유일한 종교는 외할머니였던 것 같다. 나를 가장 예뻐 해주시고 선물을 많이 사주셨으니 말이다. 역시 어린애의 마음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법..
그 때 외할머니에겐 종교가 뭐였을까? 우리 시외할머니처럼 아무아미타불? 아니면 시어머니처럼 하느님? 그 때 그 시절 외할머니에게 종교는 돈과 가족이었 던 것 같다. 개혁개방이 된 지 얼마 안 되었 을때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역시 믿을 건 가족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악착같이 돈을 버셨고, 또 아무리 먼 곳에 , 아무리 오래 가 계시더라도 , 결국엔 꼭꼭 집에 들어 오셨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서 많이 상처 받으셨을 꼬부랑 할머니도 아마 마찬가지셨을 것이다. 구부정한 등으로 할머니와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면서 고생을 하시면서도 분명히 생각 나시는 건 가족이었을 테니. 나를 쳐다보시면서 손주를 생각 하고 계셨을 지도 모른다..
시외할머니나 외할머니나 꼬부랑할머니나 살아오신 삶은 분명히 다르셨을 것이다. 하지만, 불변의 법칙 한가지: 중국이나 한국이나,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그때 그 시절 여인의 강인 함이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3대 종교는 불교, 도교, 유교란다. 물론 교과서에서 읽은 내용이다. 기독교나 천주교 등 외래 종교는 언제, 어떻게 중국에 들어왔는지 나도 모른다. 다만 1966-1976년사이에 일어났던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인 문화대혁명 시기에 여러 종교신자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던 건 사실이다. 그 후 80년대부터 중국의 여러가지 종교들은 다시 조금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던 것 같다. 내가 기독교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아마 그때 쯤이었던 것 같다.
4학년을 다니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한명이 수업 중에 갑자기 교감선생님한테 불려갔다. 그리고는 1시간 뒤에 아주 똥씹은 표정을 하고 돌아왔다. 알고 보니, 귓구멍을 뚫었다고 교감선생님께서 한바탕 혼을 내신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뚫린 귓구멍을 다시 막을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 그 친구는 공청단(共青团)가입을 거절 했단다. 이게 웬 말인가? 우리의 성스러운 공청단을 거절 하다니, 쪼꼬만게, 어디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공청단, 우리에겐 너무 성스러운 그 이름(지금 학생에게 어떤지는 모르나, 그 땐 그러했다.). 중국에서는 초등학교에 입학 하게 되면 모두 공청단에 가입하게 되어있다. 공청단은 공산당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또한 유일한 길이었다. 한번에 우르르 모두 가입 하는 것이 아니라, 몇번으로 나뉘어서 차례로 가입 하게 되어 있다. 그 순서는 아무나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 성적이 우수한 학생 혹은 학생 간부를 우선으로 한다. 즉 공부를 특별히 잘 하는 모범생, 혹은 반장이나 부반장을 맡고 있는 인재들이 제일 먼저 가입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훌륭한 학생들이 다음 순서로 가입하고, 이런 방식으로 정해진다. 보통 1차 가입은 인원수가 가장 적다. 보통 반에서 1명 혹은 2명정도로 선발을 한다. 그래서 1차로 가입하는 학생에게 공청단은 이름 자체가 너무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1차로 가입하는 학생에겐 국기게양이란 영광스러운 임무도 주어진다. 물론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그 영광스러운 국기게양에 참여를 했다는 것 아닌가?
공청단에 가입하게 되면 빨간색 넥타이를 하게 된다. 넥타이를 빼먹는 날에는 가차없이 이름이 적히고, 반 점수가 깎이게 된다. 보통 4학년이 되면, 한반에 50명중에 거의 대부분은 이미 빨간 넥타이 천지로 뒤덮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친구는 유일하게 계속 넥타이를 안 했던 것이다. 그 이유 인즉, 본인은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공청단 가입은 거절 하겠다는 뜻.
음...그때의 나로서는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 친구랑 선을 그었던 것 같다. 내가 굳게 믿고 있었던 공산당, 공청단 이외에 다른 이상한 교를 믿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유치했던 그 시절. 종교가 뭔지, 기독교가 뭔지도 몰랐 던 나는, 나와 다르다고 그 친구를 왕따 시켰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 기독교를 믿는 다는 건, 솔직히 그리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중학교 때, 더 이상 넥타이가 필요 없던 시절, 내 주위에는 기독교를 입에 달고 지내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심양(沈阳)이란 곳은 더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살던 서탑(西塔)이란 곳을 한국 상인이나, 개인 사업자들이 많이 찾기 시작 했다. 그러면서 한국매점, 식당, 술집 등이 하나둘 생기더니, 어느새 기독교 교회도 짓게 되었다.
그때 주위 친구들이 몰래 자주 갔었던 비밀장소가 교회였던 것 같다. 그때의 나로서는 기독교가 뭔지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그때 자주 교회를 드나들었던 "나쁜" 친구들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맛있는 빵과 음료수를 공짜로 나눠주는 아름다운 곳이란다.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외국어를 쓰는 분들도 계신단다. 그 아름다운 외국어로 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솔직히 너무 궁금해서 한번쯤은 가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학교 모범생의 탈을 쓰고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의 소신을 똑부러지게 지키면서 무난하게 대학시절을 시작 하던 때.
심양과 387km 떨어진 해변도시 대련(大连)에서 대학생활을 시작 한 나는 방학때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기차를 6시간동안 타고(지금은 3시간반만에 간다.) 집에 들어서면, 항상 나를 반기는 어떤 낯선 아저씨분, 새로 이사오신 이웃분이란다. 그것도 한국에서 왔단다. 웃음이 참 부드럽고 인자하게 생긴 아저씨셨다. 거기에 매너도 좋으시고 패션센스까지 남다른 멋쟁이분.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항상 들고 오시는 책이 있었다. 책갈피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성경"이란 두 글자가 유난히도 눈에 띄었고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경아저씨는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매너 있게 음식이나 음료수를 들고 오셔서, 10-20분동안 엄마와 담소를 나누시다가 가셨다. 말은 담소지만, 실은 그냥 혼자서 끊임없이 얘기하는 정도 였다. 거기엔 나에게 초등학교때의 그 공청단 거절 사건을 되새겨준 단어들도 자주 튀어나왔다. "성경","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기독교"!!! 기독교라는 세글자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나는 빈정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음식이나 음료수는 공짜로 받을 수 있어서 나쁘지만은 않았지만..나는 엄마에게 백번도 넘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절대 이런 미신종교는 믿으면 안된다고, 한번 빠지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다고. 그러던 내가 지금 보란듯이 성당을 드나들고 있으니..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나는 악마의 유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우연히 신랑을 만나고 사귀게 되면서 나는 앞으로 평생 내 골칫거리가 될 또 다른 악마-천주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건 또 뭐지? 기독교도 모자라, 이젠 천주교라?!
처음 나를 보시면서 하셨던 시어머니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종교가 무엇이냐? 그래도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서 다행이구나." 휴, 그때 내가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기독교에 가입했으면 어쩔 뻔 했어..결혼도 못할 뻔 하지 않았을까? 정말 천만다행이다. 반면 우리 부모님은 종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셨 던 것 같다. 그렇듯 중국인들은 종교에 대해 그만큼 무심하고 관심이 없었던 표현인 것 같다. 특히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
그 후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물론, 한국, 그것도 한국의 성당에서 올렸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나는 웨딩홀이나 성당이나 다 상관 없다고 생각을 했다. 또한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성당 결혼식 장면이 참으로 로맨틱하고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어 흔쾌히 승낙을 했다.
천주교 신자는 결혼식 전에 성당에서 미리 혼인강좌를 받는다 . 예비신랑 신부가 같이 참석을 해서 결혼, 육아 등에 대한 교리를 받는다. 이건 정말 좋은 프로그램인것 같다. 중국은 종교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이런 예비 교육은 없는 것 같다. 혼인생활에 대해 미리 교육을 받고, 사전 대비를 할 수 있는 것이 참 좋은 과정 인 것 같다. 중교가 없더라고 예비신랑, 신부를 상대로 이런 교육을 개설한 다면 신혼부부에게는 더없는 도움이 될 법 하다. 차라리 내가 먼저 중국에서 시작 해 볼까나?? 그럼 내가 CEO 되는건가?ㅋㅋ
이 뿐 만 아니다. 결혼식 전에 예비 신랑, 신부가 직접 신부님을 찾아뵙고, 관면혼인성사를 받아야 한다. 즉 신부님에게 가서 : "저희 결혼을 하겠습니다, 허락 해주십시오~"하면서 부모님에게 했듯이, 결혼 승낙을 받는 예식이다. 그때 부터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 한 나.. 복잡한것이 딱 질색인 나에게 역시 성당에서의 결혼식은 너무 무리 였 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결혼식 당일, 나는 드디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미안한 말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성당 결혼식을 싫어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것 같다... 성당에서의 결혼식은 길다 못해, 지루한 느낌까지 든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신부님의 말씀, 그것도 한분이 아닌, 두분이 같이 말이다. 한분은 시어머니가 멀리 부산에서 친한 신부님이라고 특별히 초대를 하셨단다. 그것도 이태리에서 오신 파랑눈 분이셨다. 나는 졸지에 다이애나 왕비가 돼버렸다. 그리 즐거웠 던 경험은 아니였지만.. 결혼식 중에 또한 이상한 광경이 펼쳐 졌다. 무종교 일반인과 천주교신자가 올리는 평범하지 않은 결혼식.. 한명은 꿋꿋하게 끝까지 서있고(나), 한명은 공손하게 무릎 꿇고 앉아 있고(신랑). 이렇 듯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또 있을까? 이외에도 성당에서의 결혼식은 지켜야 할 원칙도 까다로웠다. 사진촬영도 뒤에서만 가능하고, 성전위에 올라가는 것은 절대 금물.. 그래서 우리의 한번밖에 없는 웨딩식 사진을 보면 온통 무표정한 뒤통수뿐이다. 간혹가다 한 두장, 초췌한 옆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이번에 한국에 와서 주위 동료들을 보아하니, 천주교 신자는 적진 않지만, 결혼식을 성당에서 차린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 친구는 양가 집안에선 모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셨지만, 강력하게 반발을 해서 혁명 끝에, 끝내 화려한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마쳤다고 한다. 물론 결혼식 또한 길지 않고 아주 짤막하게..나도 그때 좀 더 기 센척 했어야 했는데, 아깝다.. 이미 엎질러 진 물인데 어쩌겠냐는..
결혼 하고 나서 우리는 신혼집을 중국 대련에 차렸다. 그래도 신혼 생활의 첫시작은 무난 했었다. 서로 다른 문화속에서 자란 두 남여가 같이 살면서 사이좋게 지내는건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 한다. 신랑의 이삿짐중에 요상한 물체들을 빼고.. 성모마리아상과, 온갖 성경들, 그리고 십자가. 특히 십자가를 벽에 걸어놓겠다는 신랑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혔다. 이 놈이 기어코 아늑한 신혼집을 요상한 가정성당으로 망칠 셈인가?
한사코 실랑이 끝에 나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얄미운, 초록색 십자가가 덩그러니, 뻔뻔하게 집안 한쪽 벽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다 . 그것도 가장 눈에 띄는, 좋은 자리에 떡 하니.. 솔직히 나는 한동안 너무 창피해서 친구를 초대 하지도 못했다. 집에 들어오면 한 눈에 안겨 오는 , 무서운 십자가, 피를 빨아먹을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함..그리고 집안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요상한 물체들을 보면 친구 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주위 친구 들 중에 종교를 믿는 친구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종교를 믿는 것이 죄도 아니고 법에 어긋 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마음 한 구석은 찜찜한 그런 기분..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이랄까?
엄마아빠 또한 신혼집에 오실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셨다. 신랑이 없는 틈을 타서 마리아상이나, 성경책들을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시질 않나, 심지어 십자가를 떼어내시고 눈에 띄지 않도록 벽 구석모퉁이에 걸어 두시기도 하셨다. 그걸 다시 귀신같이 찾아내고 원상 복귀 시키는 신랑- 나는 이 놈에게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어서 탄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럭적럭 무난하게 보냈던 우리의 신혼생활, 그 고요함을 깨뜨린 한통의 전화, 절실한 천주교신자이신 시어머니셨다. "새 아가야. 너도 이제 슬슬 교리를 시작해 봐야 하지 않겠니? 난 새 아가한테 바라는게 없단다. 그저 세례를 좀 받았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이런 ..청천벽력일 줄이야!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도다!!
어른앞에서는 찍 소리를 못하고, 뒤에서 신랑과 또 한바탕 전쟁을 해 댔다. 아니, 왜 날 강요를 하냐고? 나는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종교라고, 믿지 않은 걸 믿으라고 강요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이번에는 기어코 혁명을 이룰 생각이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혁명은 역시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단다.
신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와 시어머니 중간에서 쩔쩔 매기만 했다. 결국 ..자존심 상하지만 나는 또 한번 전쟁에서 지는 고배를 마실 수 밖에. 그리하여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울며 겨자먹기로 교리를 시작한 대목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 성당으로 가는 길이 나에겐 정말 두렵고 또 두려웠 던 기억이었다. 그것도 중국에서..정녕 나도 이렇게 미신과 이상한 교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마는것인가? 내가 몇십년째 조심스럽게 지키고 있었던 무언가를 내 손으로 직접 깨뜨리는 기분이었다.
교리수업은 나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무신론자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보이지도 만지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하느님이란 존재를 받아들이라는 건 참으로 하늘의 별따기 였다.
교리를 받으면서 주말마다 신랑과 함께 대련의 한인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았다. 물론 처음엔 격하게 거절을 했지만 말이다. 대련 시내에는 천주교 성당이 하나밖에 없다. 그것도 전문 한인성당이 아닌, 중국인 성당과 함께 쓰고 있는 허름한 건물이다. 한국으로 오기 전에 새 건물 시공 중이었지만 지금쯤 아마 다 지었을 것이다. 나는 신랑과 함께 한국어 미사를 갔었다. 대련에 성당은 적었지만, 반면 교회는 여러군데가 있었다. 역시 어딜 가나 기독교가 참 많은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처음 미사를 갔을 때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신부님의 위엄있는 모습과, 얼굴에 절실한 표정이 묻어나는 신자들의 모습.. 나에겐 처음이라서 너무 신기하고 충격적인 모습 이었다. 거기에 내가 끼어 있다는 자체는 더 충격적이었지만 말이다. 처음엔 신부님의 강론이 너무 길고 외국인인데다 처음 들어보는 종교에 대한 얘기라, 당최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인자하고 감미로운(?)신부님의 목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신부님은 역시 아무나 되는 법이 아니다. 일단 목소리가 좋아야 함.)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니, 내용도 쏙쏙 귀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중국에서 미사를 볼 때 흥미로운 점이 한가지 있었다. 바로 수녀님의 옷차림.
중국에서는 수녀님이 수녀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대신 평상복을 입는다. 신부님은 한국에서와 똑같은 사제복을 입는다. 그래서 가끔 성당에 가면 대체 어느 분이 수녀님이신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나는 사실 중국어 미사도 가끔 보러 갔었다. 인구가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법. 갈때 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도 모자라, 성당 밖 길 건너편까지 쭉 뻗은 긴 줄을 보면, 중국에 천주교 신자가 이리도 많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많았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안에서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은 곧잘 듣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 했다. 역시 천주교 신자를 하려면 귀도 밝아야 할 것 같다.
중국어 미사와 한국어 미사는 거의 비슷 한 것 같았다. 내용 상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종교신앙 자유를 추구하는 중국이지만, 내용이 조금 다르다고 한다. 한국에서 천주교신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규정 되어 있는 것처럼, 중국의 천주교도 중국 실정에 맞게, 일부 내용을 수정 했다고 한다.
미사를 보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말씀의 전례에 이어 계속 되는 성찬의 전례에서 진행 되는 영성체 예식이었다. 영성체 예식 중에 신자들이 한명씩 나가서 신부님이 주신 과자 같은 것을 받아 먹는 것. 그런데 신랑은 아무 말 없이 나보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눈치를 준다.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았다. 뭐 그 잘난 과자를 얻어먹기 위해서 온 건 아니지만, 남들과 차별대우를 받는 자체가 기분이 언짢은 것이다. 혹시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나중에야 신랑이 나의 무식함을 깨우쳐 줬지만...나에겐 아직 하느님의 성체를 받아 먹을 자격이 없어서 그렇단다. 즉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몸이기 때문에.. 그때 부터 난 이 악물고 기를 쓰면서 교리 공부에 매진했다. 학교에서도 1,2등을 다퉜던 내가 , 교리공부를 못 넘길까봐..흥!, 두고보지..
끝나지 않을 줄로만 여겼던 장장 6개월간의 악마의 교리수업을 받고 나는 드디어 해방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교리를 받고 또 시험을 보란다. 그것도 필기가 아닌 , 신부님과의 1대1 면담 시험이란다. 참내, 대학수능 시험도 아니고 이게 대체 웬일인고?
1대1면담 시험에서 , 신부님은 이것 저것 많이 물어보셨다. 그리고 교리수업을 받으면서 힘든 부분이 없었는지도 물어보셨다. 나는 감미로운 신부님의 목소리에 홀려, 솔직하게 다 얘기 해 버렸다. 자라왔던 , 교육을 받았던 환경과 너무나도 차이가 많은 내용이라서 사실 100%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았다고.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그런 솔직함을 신부님이 마음에 드셨던 모양인지, 연신 머리를 끄덕이시며 밝은 표정을 지으셨다.
드디어 순조롭게 교리시험을 통과 하고 , 나는 자랑스럽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대모님도 생기고, 예쁜 세례명도 생겼다. 에스텔- 별이란 뜻이다. 그리고 축일도 생겼다. 7월1일.
세례를 받는 날, 나는 예쁘고 단정하게 차려 입고 성당에 나섰다. 신부님이 성수를 내 이마에 조금 부어주실 때 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죄와 벌을 씻어낸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조금 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뭐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은 대죄는 별로 없었지만, 소죄는 부지기수 였으니..
세례가 끝나고 신부님은 대표로 나더러 소감을 밝히라고 하셨다. 이것도 신부님이 미리 나에게 부탁 하신 거였다. 나는 내가 느꼈던 어려운 점, 그리고 그 때 그 순간의 설레임을 솔직하게 글로 적어서 발표를 했다. 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성당에 퍼지는 날이 다 오다니, 누가 상상을 했겠나.. 발표 후 대모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뜨겁게 박수를 쳐 주셨다. 순간 나도 무언가 뭉클한 것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 신부님은 완전 필 받으신 것 같았다. 오죽 했으면 식사 할 때 신부님이 나를 옆에 앉히시더니, "오늘 에스텔은 하느님보다 더 눈길을 끌었네."하셨겠는가? 평소 미사 때 조금만 딴데 정신을 팔아도 귀신처럼 알아보시고 엄하게 지적하셨던 분이! 역시 그날 내가 잘하긴 잘 했나보다. ㅋ
세례를 받고나니 조금 더 성숙해 진 느낌이랄까? 이렇듯 나는 성당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해 나가기 시작 했다. 나의 이런 모습이 참으로 대견 하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이 기분.. 내 친구들은 아직 이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기회를 보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본 결과, 애들은 별로 신경을 안 쓰듯 별탈 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어느날, 친구가 아일랜드로 여행 갔다 오면서 나에게 묵주 선물을 해 줬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역시 나는 그동안 고리타분하고 갑속에 들어있었던 촌년이었다는 것을.
그때 부터 였던 것 같다. 친구와 자연스럽게 천주교 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 동안 내가 몰랐 던 사실을 발견 했다. 친구들 중에는 종교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심 있는 애들이 많았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점, 그리고 매주 성당에서 미사를 볼때 어떻게 보는지,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지.. 샘 솟듯 시작한 질문은 쉴새없이 쏟아지고, 난 그 질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는 사아에 자연스럽게 애들과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고, 나 또한 내가 싫어했던 이 종교에 대해 진지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예고 없이 들이닥친 인생 최대....는 아니고, 세례 받고 나서의 최대의 시련. 나보고 고해성사를 하란다. 교리 받을 때 들은 건 있어서 이것만은 자신만만 했다.
고해성사: 가톨릭 신자가 알게 모르게 범한 죄를 성찰 통회 고백 보속 등의 절차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는 성사. 고해성사는 신부님과 1:1로 고해실에서 진행이 된다.
나는 일주일전부터 교리에서 배웠던 내용대로 고해성사를 받을 때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끊임없이 되새겨 봤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받는 날, 고해실에 들어갈 때의 그 떨림이란, 겪어 본적 없는 사람은 절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고해실은 고해자의 얼굴이 안 보이게 고백 받는 방과 고백 하는 방이 따로 갈라져 있다. 신부님은 고해실의 안쪽 방에 미리 들어가 계신다. 고해자는 바깥쪽 방 의자에 앉아야 한다. 고해자는 두 방사이에 뚫려져 있는 조그마한 칸막이사이로 고백을 한다.
고해실에 들어간 그 순간, 난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한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저도모르게 안쪽 방문을 활짝 열어제낀 나, 분명히 무언가에 씌운 것이 틀림 없었다. 아무렴, 머리좋은 내가 어떻게 그런 멍청이 짓을 할수가..문을 연 순간, 순간 눈에 띈 인자한 모습,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어라, 우리 신부님 아니신가? 신부님이 맞으시네.. 아악!!
그렇게 신부님과 나는 몇초동안 뚫어지게, 묵묵히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 멀뚱멀뚱한 나의 두 눈, 그리고 그 속에서 눈알이 1초에 5번정도 초고속으로 데굴데굴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평소에 잔머리 대마왕이었잖아, 빨리 그 잘난 머리를 굴려봐봐, 이 멍청아!! 난 조용히 문을 연채 문가에 서 있었다. 얼핏 보면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실은 굳어 있었던 것이다. 신부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그러신지, 한동안 말문이 막혀서 입을 딱 벌리시고 나를 바라보시기만 했다. 그렇게 몇초가 흐르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하느님이 나를 구원해주시는 목소리였다. " 나가시오. 에스텔!"
"예" 나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바로 깨갱 하면서 문을 닫고 바깥 쪽 방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후 10분동안 나는 내가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나다. 내가 누군지 뻔히 아시면서도 모른척 하셔야만 했던 신부님도 안쓰럽고, 그런 머저리 짓을 한 나를 이해 할수도 없었다. 신부님과 나 사이에는 조그마한 벽이 가로막혀 있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알면서도 무의미하게, 고해성사를 마쳤다. 내 생애 첫 고해성사이자, 최악의 고해성사 였다. 역시 교과서의 내용을 수백번 외우기보다 단 한번의 실습이면 효과만점이었다.
지금은 한국에 온지 1년 정도 되었다. 나는 갈비뼈가 부러질 때를 빼고는(이건 하느님의 실수 이신듯, 그냥 해 본 소리에 넘 경청을 해 주신 나머지 내 갈비뼈를 부러뜨려놓았음) 주말마다 꼬박꼬박 성당을 다닌다. 물론 고해성사의 금물인 그 판도라의 방문을 열어놓는 일은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시아버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실 동안, 신랑과 함께 병원에서 미사를 본 적도 있었다. 이것도 신기했다. 중국에서는 신부님이 병원에까지 찾아오셔서 미사를 보는 일은 없다. 신랑과 나는 병원에서 미사를 볼때 아주 운좋게 제1독서, 제2독서를 잃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물론 신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왜냐면 신랑은 사람 많은데서 발표를 할 때마다 목소리를 깔면서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결혼식 때 혼인서약을 읽을 때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한동안 나한테 엄청 놀림을 받았었다. 병원에서 미사를 보는 환자들이 워낙 연세 많은 어르신분들이 대부분이라, 멀쩡하게 생긴 우리가 선정이 된 듯 하다.
아참, 그리고 신랑은 성가대도 한다. 돼지 멱 따는~~~정도는 아니지만.. ㅋㅋ 농담이고, 꽤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남편은 연말 성당 콘서트에서 솔로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던 적도 있었다. 그때 내가 뿅 갔었지, 아주 잠깐이지만.. ㅋㅋ
어느덧 나의 일상으로 변해 버린 신앙생활. 지금은 힘들 때마다 제일 먼저 생각이 나는 것이 성당이다. 단 5분이라도 성당에 앉아있으면 맘이 평온 해지는 이 느낌은 뭐랄까? 솜사탕을 먹은 듯 나른해 지고, 담백해지는 이 기분. 난 사실 아직 이 느낌이 뭔지 정확하게 모른다. 하느님을 믿는 듯 하면서도 , 아닌 듯한 이 묘한 기분을. 역시 난 아직까지 신앙심이 부족 한가보다. 그래서 행복할 때보다는 힘들 때 하느님을 더 많이 찾는 것 같다. ㅜㅜ 언제 철 들지..
쓰나미처럼 한순간에 내 인생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 모든 것.
내가 믿고 보아왔고, 배웠던 모든 것이 틀리다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보고 , 느끼고, 가고 있는 이 길이 옳다는 말도 못하겠다. 왜냐면, 이건 옳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다.
외할머니와 시외할머니는 다르셨다.
시어머니와 시외할머니는 다르셨다.
어머니와 그 옆집의 성경 아저씨는 다르셨다.
나와 그 초등학교 친구도 달랐다.
그리고, 신랑과 나, 또한 많이 달랐지만, 우린 지금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달라질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것이 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시외할머니나, 시어머니나, 우리 엄마나, 내 소꿉시절의 친구나, 그리고 나의 사랑스러운 신랑이나..
누구를,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믿든간에,
그건 단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방식의 일종의 표현 일 뿐.
그런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
열심히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이렇듯 밝은 햇살아래에서 사랑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