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짜장면, 술독에 빠져 삼겹살이 될뻔 하다.

김치에게 빠진 짜장면

by 랑랑이

맥주, 소주, 막걸리, 동동주...술의 천국- 대한민국에 온 걸 환영한다. 짝짝짝!

한국이라 하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는 것이 있다 -회식 문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술문화.

한국의 술문화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 져 있기 때문에 굳이 끄집어 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의 이번 "업적"은 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얘기를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지난번에 "난타"사건이 끝나고 우리의 사랑하는 부사장님은 어디서 구하신 건지 30년산 발렌타인을 불쑥 꺼내시더니 난타 팀이 수고 했다고 한잔씩 돌리셨다. 그때 주위에 동료들은 발렌타인이라는 말에 모두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샛별처럼 빛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사장님을 바라봤던 것 같다. 나만 빼고, "발렌타인은 또 뭐꼬? 2월14일에 먹는건가??" 이 촌년은 그 동안 양주맛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터라 사람들이 이렇듯 열광하는 이유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직접 먹어보니 뭐, 맛은 그럭저럭 마실만 했다.(역시 시골티가 팍팍..)


양주 한병을 난타 팀 맴버들사이에서 한잔 씩 돌리고 나니, 아직 두잔 정도의 양이 남았다. 그 때 부사장님은 나를 스윽 쳐다보시더니 "우리 에스더는 외국에서 왔으니 한잔 더 받아야죠"하면서 적극적으로 술잔을 나에게 돌리셨다. 그때 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겁도 없이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이미 한바퀴 돌린 술잔으로 마셔야 한다는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양주를 비우고, 이젠 본격적으로 맥주를 할 타임. 나는 동료들이 권하는 대로 , 벌컥벌컥 맥주를 또 들이키기 시작 했다.


양주 두잔에 맥주까지 들어가니, 조금 해롱해롱 해지면서 나의 무한한 상상력은 또 제멋대로 나래를 펼치기 시작 했다.사실 나는 어릴적에는 술과 인연이 깊었다. 아버지가 애주가셨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4학년부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자주 맥주를 사러 동네 편의점에 갔었다. 그때는 편의점을 소매포(小卖铺)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사탕을 사먹었다. 하긴,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리 순순히, 매일 부지런히 심부름을 갈리 만무하지. 그때 그 시절 맥주를 살 때는 병채로 사지 않았다. 병채로 살 경우 더 비싸게 팔기 때문에, 집에 있는 빈 맥주병을 들고 가면 새 맥주로 바꿔줬었다. (지금은 대부분 병채로 사지만..)나는 그 몇 안되는 사탕의 유혹에 빠져 매일 그 시간만 되면 기대에 찬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러면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3위안(500원정도)을 꺼내시면서 "옛다, 맥주 두 병 사오너라!" 하셨다. 그럼 나는 좋아라 빈 맥주 병을 안은 채 한달음에 소매포로 달려가서 아주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말한다."아주머니, 맥주 두병 주세요!" . 아주머니는 맥주 두병을 주시면서 자연스럽게 사탕 두알을 건네 주셨다. 지금은 보잘것 없지만, 그때 그 시절엔 사탕 두알에도 더없이 행복을 느꼈던 순수한 나이였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지만, 많이 드시지는 않았다. 하루에 맥주 한병 정도만 하셨다. 아버지가 맥주를 드시는 동안 나는 옆에서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노란색 맥주주위에 둥둥 떠있는 하얀 거품이 너무 이쁘고 신기했다. 하얀 구름처럼 폭신폭신 , 말랑말랑 한 것이 솜사탕 처럼 달달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한 눈 파신 사이, 살짝 하얀 솜사탕을 몰래 핥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쓰디쓴 맛에 데여서 그 후부터 술이란 것이 싫어졌다. 역시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맥주 외에 아버지는 가끔 백주(白酒)도 드셨다. 백주는 한국 소주와 겉모습이 비슷한 중국 전통소주다.하지만 한국 소주보단 알콜함량이 훨씬 높은 것이 특징. 종류에 따라 알콜함량 또한 다르다. 보통 40-50도가 대부분이고, 70도 넘는 백주도 있다. 그래서 백주는 한입에 먹는 것보다는 조금씩 맛을 음미하면서 먹는 것이 좋다. 또한 알콜함량이 높아서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이 찾는다.


어릴적 쓰디쓴 술맛을 한 번 본후부터 나는 가급적 술을 피해 다녔다. 중, 고딩 때는 물론이고,어엿한 대학생 시절에도 나는 범생이 스타일을 고집해 왔다.주위에 가끔 술을 마시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거의 입에 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외대는 남자보단 여자가 훨씬 많았으니 여자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실 기회도 그닥 많지 않았다. 한국에선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나는 술과 친해질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부서는 불쌍하게도 남자 직원이 달랑 4명, 그것도 매니저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중에 두명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도 술을 잘 한다고 들었지만, 우리 매니저는 아니었다. 뭐 우리 앞에서는 능력을 발휘 할 기회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부서는 회식때는 재잘 거리는 여직원들 때문에 항상 먹는것과 수다를 떠는 것에만 열중 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 1년동안 지내면서 느낀 건데 술문화가 중국과 많이 달랐다. 한국에서만 가능한 폭탄주!! 나에겐 너무 무시무시한 괴물이다..고진감래주, 무지개주, 메로나주..별의별 기상천외 폭탄주들을 만드는 다양한 방법들이 인터넷에 난무하다. 맥주와 소주를 일정한 비율로 섞어서 저가락으로 한번 툭 찍고 원샷을 해 버리지를 않나, 거기에 양주까지 섞어서 건배 하지를 않나..처음 이런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는 이방인으로써는 이 모든것이 신기 할 따름이다.


또한 한국은 잔이 다 비워질 때 까지는 술을 더 붓지 않는다. 중국은 첨잔이 가능하다. 술잔이 조금만 비워져도 다시 채워주는 것이 예의이다. 한국은 보통 술잔을 비우는 것이 원칙 이다. 비운 후에는 빈 술잔을 보여 주기 위해 머리에 대고 쏟기도 하는데, 참말로 신기한 광경이다. 중국은 잔을 비우기도 하지만 , 보통 본인의 주량에 따라 다 비우지는 않고 예의상 적당하게 마셔준다. 그리고 중국은 술을 먹기 전에 본인의 잔을 들어 올리고 축하의 말을 한 후 술을 마신다 . 더욱 신기 한것은 술잔을 돌리는 한국의 풍습이었다. 중국에서는 남의 술잔을 나에게 돌려서 마신 다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서로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한다지만, 그래도 가끔은 조금 찝찝하다. 그래서 부사장님이 주셨던 그 때 그 술잔이 아직도 생각이 날 때가 있다. ㅋㅋ


술문화에 대한 얘기가 나오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각이 난다. 신랑이 처음 부모님에게 인사 드리는 자리에서 , 아버지는 같이 술 한잔 하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애지중지 하시던 얼꿔터우(二锅头:중국의 흔한 백주 종류의 한가지, 56-72도정도) 한병을 꺼내시더니 조그마한 소주잔을 가득 채우시고는 신랑에게 권했다. 신랑은 아주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과감하게 한입에 술잔을 비웠다. (이럴 때만 카리스만 짱.)그때 신랑을 쳐다 보셨던 아버지의 눈빛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그 이상야릇하고, 묘한 눈빛을..나중에 아버지가 신랑 몰래 나에게 하셨던 말: 쟤 뭐냐, 무슨 술을 그렇게 잘해? 술군 아니야?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은 한국과 중국의 술문화로 인하여 빚어진 오해 였 던 것이다. 신랑은 술을 받고 당연히 한국의 술문화 대로 술잔을 한번에 다 비웠지만, 아버지에게는 50도넘는 술을 한입에 다 삼킨다는 건 두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 술군이거나 미쳤거나.. 그러니 오해 하 실 수 밖에..


재미있는 술문화 외에도 한국의 회식 문화 또한 흥미롭다. 한국에서는 회식자리가 업무의 연장이라고 한다. 본인 의사대로 가거나 빠지거나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자리가 아니란 뜻. 나는 사실 1년동안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그렇게 눈치를 본다는 느낌은 그닥 받지 못했지만. 외국계 회사라 그럴 수도 있고, 또는 요즘 회식이나 술문화가 많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은 회식이 1차, 2차, 3차..무한차로 연결이 된다. 흥이 날때 까지, 끝을 볼 각오를 하고 술을 먹다가 , 그 다음 필수 코스-노래방으로 이동한다. 노래방에서도 필수 댄스가 있다. 바로 그 전설의 관광버스춤. 한국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즐겨 추는 춤이란다. 수십명의 남여가 모여서 "doc와 춤을"이란 곡에 맞춰서 춤을 추는 모습은 완전 무아지경이다. 사실 DJ DOC란 그룹도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


반면 중국은 회식에서 술을 무리하게 마시지 않고, 아주 깔끔하게 1차에서 끝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식 자리에 안 간다고 눈치를 볼 일은 더욱 없다. 가족이나 개인을 먼저 챙기는 중국인에게 회식은 그냥 회식 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술자리에선 보통 맥주가 대부분이다. 중국도 노래방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신이 멀쩡할 때 노래를 부르기 위해 찾는다. 한류의 위엄이 어마어마 하기 때문에 노래방에 가면 한국 노래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에는 아직 중류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요즘은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많이 늘긴 했지만, 아직 노래방에는 옛날노래가 대부분인 것 같다. 한번은 회식 때 2차로 노래방에 갔었는데 동료들의 부추김에 못이겨 얼떨결에 마이크를 잡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노래방 기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원하는 노래를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주위 동료들이 권하는대로 "첨밀밀"을 부를 수 밖에. 중국 친구들이 알면 실로 포복절도 할 일이다. 휴, 졸지에 50-60대 아줌마가 돼버린 듯한 이 느낌은, 뭐랄까, 어..맞다..마치 한국인이 중국 노래방에서 아리랑을 부르는 그런 심정이라고 할까?


너무 두서 없이 주절주절 댄 것 같다. 술 얘기가 나와서 그런지 재미있는 추억들이 새록새록 많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나저나 양주와 맥주를 실컷 먹고, 우리는 2차를 향해 고고싱! 하지만 이번에 우리는 2차 필수 코스-노래방 대신 족발집으로 향했다. 한국은 족발집이 참 많은 것 같다. 중국도 족발을 먹지만 족발집이 따로 있지는 않고, 분식집이나 큰 슈퍼마켓에서 많이 판다. 가끔 집에서 직접 만들어서 먹기도 한다. 족발집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우리는 수다를 떨면서 소주로 갈아타기 시작 했다. 물론 나도 주위 동료들이 먹는대로 덩달아 따라서 먹었고. 이건 모두 자신의 주량을 너무 과대평가 한 탓..


소주를 몇잔 하다가 이제 슬슬 한계가 다가오기 시작. 나는 팽팽해진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어느 순간 탁-하고 필름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웬걸, 집이었다. 그것도 침대가 아닌 바닥에 버린채로..이 망할 놈의 남자, 내가 밤새도록 토한다고 침대에 재우면 침대가 더럽혀 질것이 뻔하니 , 그냥 바닥에 버린채로 방치 해 둔것 이다. 그래도 양심은 좀 남았는지 보일러는 빵빵하게 틀어놓았지만. 후에 알고 보니 보일러를 틀어놓으면 더 토를 한다더라.. 참내, 나쁜 놈, 나를 바닥에 버린 것도 모자라.. 비싼 와인까지 다 뱉어내게 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왼쪽 다리 바깥쪽이 이상하게 통증이 심해서 보니, 이게 웬일?! 동전만한 상처가 나 있는것이다. 바닥에 자는 나를 배려 한답시고, 보일러를 너무 틀어놓았 던 것이다.나는 그것도 모르고 인사불성이 된 채로 밤새 꼬꾸라져 있어서 다리에 심하게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난 다리가 삼겹살이 돼버렸다.


화상은 그렇다 쳐도 회사에서의 나의 얌전한 이미지는 또 어찌 할고? 공튼 탑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나는 애써 그 전날 족발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기억 해 내려고 안간 힘을 써지만 헛수고였다 . 그래서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술김에 무슨 짓을 한건 아니겠지? 역시 하루도 못가는 이 사고뭉치를 어찌 할고.. 부랴부랴 일어나서 보니 노트북도, 핸드폰도 안 보인다. 그제야 신랑은 기가 막힌 듯 혀를 쯧쯧 차면서,나를 끝까지 챙겨 줬던 동료의 이름을 댄다. 나는 비겁한 어조로 이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원님! 혹시.. " "아, 노트북이랑 핸드폰을 찾으시는거에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시는 이 위원님, 역시, 자상한 남자야.


핸드폰과 노트북은 찾았지만, 아직 안 풀린 수수께끼가 있다. 그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나는 그것이 너무도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창피하게 직장동료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일..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타겟을 신랑으로 돌릴 수 밖에.

"오빠, 나... 어제.. 집에 어떻게 왔어?"

신랑은 아주 어이 없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물어봤다. "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나는 비굴하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미안..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


신랑의 시선으로 본 그날의 광경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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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넘은 시간인데도 전화 한통 없는 이 계집애는 대체 뭐꼬? 전화를 해 봐야지. 대여섯번 했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 어라? 내 전화를 씹네.. 계속 해 본다. 드디어 전화를 받는다. " 야, 너 어디야?" 홧김에 다짜고짜 먼저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전화 속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에스더 남편 분 되시나요?"

"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거기 어디시죠?"

" 아, 여기 XX 족발 집 앞인데요, 에스더가 많이 취해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서요. 좀 데리러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이 계집애, 역시, 잠잠 하다 싶다니, 또 사고를 쳤네..

" 네, 거기 위치를 좀 알려주시면 제가 지금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츄리닝 바람으로 택시를 잡고 바로 그 망할 놈의 족발집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 눈앞의 광경에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젊은 남자 두명이 족발집 앞에 서있는 모습이 보이고, 중간엔 어떤 미친년이 몸도 가누지 못하고 비실비실 거리면서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정 하기 싫었지만.. 그 미친년이 바로 내 마누라였다. 마누라는 계속 "욱, 욱" 하면서 끈적끈적한 하얀 액체를 쏟아내고 있었고, 거기엔 가끔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원래모습이 상상이 가는, 건더기들도 같이 섞여서 나오기도 했다. 남자 두명은 보디가드처럼 옆에 서서 , 연신 휴지로 옷이랑 입이랑 닦아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에스더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일부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소리는 최대한 낮게(너무 창피하니까.) 깔고, 남자 두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중 한명이 " 안녕하세요" 하면서 서글서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인사를 했다. 키가 조금 작은 편이고,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 인상이 좋은 젊은 남자였다.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연신 허우적대는 "스카이댄스(춤추는 고무풍선)"을 택시에 꾸역꾸역 집어 넣고는, 인사도 못하고 도망치듯 택시에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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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랑은 그렇게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인사불성이 된 나를 구제해 줬지만, 나는 이렇게 내 의사와는 상관 없이, 삼겹살이 돼버렸다. 너무 오래 구워서 탄내가 팍팍 나는 삼겹살..


삼겹살 사건 후, 나는 한동안 회사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 했다. 특히 범죄현장에서 직접 두 눈으로 나의 추태를 확인 했던 이위원과 박위원은 이미 나의 블랙리스트로 추방된 지 오래다. 나를 볼 때마다 웃을듯 말듯 입꼬리를 실룩실룩 거리는 모습이 너무 얄미워서 한대 치고 싶은 심정 이었다.


어느덧 1년이 되가는 지금, 아직도 내 왼쪽 다리에는 동전 만한 화상 자국이 남겨 있다. 이 상처를 볼 때 마다 생각 나는 웬수: 술, 그리고 삼겹살이 될 뻔한 내 이쁘고 하얗던 ,불쌍한 다리여~~


지금도 나는 한국의 술문화에 대해서 아직 많이 낯설다.솔직히 말하자면 그닥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문화다. 물론 요즘 분위기는 많이 좋아 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내가 다니는 외국계 기업 같은 경우. 회식자리에서 술을 강요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하지만 다른 공기업이나 국내업체에서는 아직까지 갈 길이 먼 것 같다.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일원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말: 이젠 대한민국도 변할 때가 된 것 같다. 적당히 마시고,

술잔보다는 정으로 취하는,

회식자리에서도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이 되는 그 날까지,

나는 변함없이,

조금 야속하지만(내 다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사랑스러운

이 나라가 발전 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북촌 한옥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