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에게 빠진 짜장면
그동안 나는 자신이 한국어를 그럭저럭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조금 건방지게 얘기하자면, 나는 한국어를 아~주 잘하는줄 알고 있었다. 뭐, 주위에 친구들도 그렇게 얘기를 하니 나의 오만방자함 또한 날로 하늘을 찌를듯 솟아오를 수 밖에. 그런 나에게 1차시련은 예고도 없이 살금살금 다가왔다.
한국에 온 지 몇개월 되던 때,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아직은 모든것이 낯설고 서먹서먹한 이 분위기를 어떻게서든지 풀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던 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박위원(아직도 적응중이긴 하지만, 우리 회사는 직급이 모두 위원이란다.)이 다른 부서 A 군이랑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찌나 신이 나게 얘기 하던지, 옆에서 귀가 솔깃해서 엿듣고 있는 이 스파이를 눈치채지도 못하고말이다.
박위원 왈: "오늘 번개에요?" ,
A 군 왈: "네" ,
박위원 왈: "어디서?"
A군: "매봉에서, 장소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기로 했어요"
박위원: "그래요? 음, 그럼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겠네요"
A군: "이따가 퇴근하고 같이 나가요".
이 두 분은 정신없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 옆에서 열심히 듣고 있던 나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가고 있었다.
번개? 매봉? 뭐지? 한국에선 번개 치는것도 모여서 구경할 만큼 신기한 광경인가보지? 대체 어떤 번개가 친다길래 이렇게 오버를 하는거지?
나는 어색하지만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조금 가식적으로 보였을지는 모르지만..ㅋㅋ), 그리고 나의 최종병기인 이쁜 꾀꼬리 목소리로, 용기를 내어서 말을 꺼냈다.
" 위원님, 오늘 매봉에서 번개 쳐요?".
옆에서 신나게 얘기중이던 박위원은 무심한 듯 나를 힐끗 쳐다보면서 "예"하고 대답 한다.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대화에 끼려고 노력해보자 : "네, 근데 번개 치는 장소까지 알려주는거에요?" .
그제야 관심을 보이듯 나에게 시선을 돌린 박위원은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싸, 좋았어, 시선 끌기 작전 성공.
나는 한층 더 커진 목소리로 또랑또랑 ,또박또박 설명을 한다:"오~ 한국이 참 대단한 나라네요. 일기예보에서 그런것까지 알려주나보죠? 근데 보통 한국분들은 번개 치면 그걸 구경하러 가시는거에요?"
그 후의 10초동안은 , 감히 말하는데, 내 생애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더이상 돌이켜 생각하기도 싫은 그 10초동안, 말없는 정적이 흐르고 나는 눈만 껌벅껌벅.. 결과는 뻔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괘씸한 박위원과 그 A 아무개군이 내 앞에서 박장대소를 하면서 배를 잡고, 우는지 웃는지 구분도 안 가는, 경련발작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그 번개는 하늘에서 치는 번개가 아니고, 번개모임, 회식이란 뜻이란다. 나는 그날 내가 그토록 원했던 토크의 중심에 드디어 오르게 되었다, 물론 동시에 가장 멍청한 바보로 전락이 되기도 했지말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단다. 그 동안 나는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라고 자부 해 왔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아직 나무를 타보지도 못하고 그냥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던 새끼 원숭이라는것을.. 그래서 그 치욕스러운 10초가 싫기도 하지만 또 고맙기도 한다. (아마 그 치욕스러운 10초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 성격상 입 닥치고 얌전히 있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높고 굵은 이 한글나무의 꼭대기를 향해서 열심히 돌진 하고 있다. 나중에 정말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오면 그땐 아퍼도 달콤 하겠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