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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Mar 14. 2023

무언가가 되지 않으려 할 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라니에세이 2. 꿈 : 무언가가 되지 않으려 할 때, 무엇이든 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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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었다. 어렸을 적 장래희망란에 적었던 꿈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꿈꾸는 시간을 갖지는 않는다. 꿈이란 건 지나가버린 시간에,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에 마음을 더 많이 향하도록 한다는 걸 느끼게 된 후부터다. 무언가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살아내기.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한 삶이 아닌 내 앞에 펼쳐지는 일들을 그저 경험하는 삶을 살 것.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않을 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작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기자, 언론인, 라디오 작가, NGO 활동가. 그리고 … ?


‘꿈’이 곧 ‘장래희망’ 혹은 ‘희망직업’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던 때, 그러니까 청소년기 장래희망란에 적었던 키워드들이다. 기자나 언론인이 되려고 했던 뚜렷한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 속 장면은 집으로 배달되던 일간지를 빼먹지 않고 읽던 단발머리 여고생의 모습이다. 밑줄을 그어가며 꼼꼼하게 읽고 스크랩도 했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에 꽤 관심이 컸던 것 같다. 대학교도 비슷한 문제를 다루는 학과로 진학한 걸 보면 말이다(비록 학업에 충실한 학생은 못 되었지만.). 학부생 때는 사회 문제와 인권 문제를 다루는 동아리 활동, 대외 활동에 열심히 었다. 그 영향 때문에 자연스럽게 NGO 활동가의 삶을 꿈꿨다. 스물아홉 살까지는.


꿈은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래서인지 ‘꿈’은 ‘이루다’, ‘실현하다’, ‘달성하다’ 등의 서술어와 자주 어울린다. 따라서 꿈은 이뤄야 하는 것, 실현시켜야 하는 것,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꿈을 이야기할 때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미래를 향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해내야 할 일을 떠올리고, 동력 삼아 이뤄낸 모습을 그려보는 일은 늘 미래 시점의 이야기니까.


서른이 시작되던 무렵, 새로운 길을 택해야 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그때도 ‘기자’, ‘언론인’, ‘NGO 활동가’처럼 꿈이라고 하면서 뚜렷하게 지향했던 것이 있기도 했다. 포기라고 해야 할까, 단념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그 꿈은 일찍이 접었다. 그때의 나는 ‘꿈은 이뤄내야 하는 것’이라는 강박과 조급함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그것 아니면 안 돼!’라며 제한해 버린 순간, 좁아진 시야에 갇혀버린 나머지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내가 꿈꾸던 삶을 먼저 이뤄낸 또래들을 볼 때면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무얼 했나. 왜 나는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가.’ 그 순간의 나는 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서로가 성장한 배경과 살아온 삶이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교하는 마음이 앞섰다. ‘꿈’을 꾸지 않았던 건 그 이후부터였다(지금 생각해 보니 약간의 비겁함, 회피도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꿈의 실현’이 곧 ‘자아 정체성의 실현’이라는 등식도 생각해 보게 된다.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자아’와 ‘정체성’이라는 두 개념에 골몰하던 때가 있었다.‘나’라는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주변 환경과 상황, 인연에 따라서 ‘나’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지향하는 하나(혹은 단 몇 가지)의 대상에만 ‘나’를 묶어두는 건 그것 외의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정체성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처럼 정체성도 변화할 수밖에 없을 텐데. 우리는 자신 안의 무언가를 꼭 찾고, 밝혀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딱히 의문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게 과연 옳다고만 할 수 있을까.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라는 의무감이 내 안에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작용하는 그 힘이 크면 클수록 내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떠돌고 있다는 경향성도 알게 되었다.


종종 만나 커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 마음 쓰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분이 있다. 자신은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고 늘 이야기하시는 분. “학생들을 만날 때는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만 생각해요. 글을 쓸 때는 온전히 그것에만 마음을 두고요. 라니쌤과 커피 마실 땐 그냥 수다 떠는 친구가 되어요. 저는 강사도 되었다가, 글 쓰는 사람도 되었다가, 또 친구도 되었다가. 그렇게 늘 바뀌어요.”라고 이야기하던 그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자유로워 보였고, 그 모습에서는 당당함도 느껴졌다.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오직 이 순간, 자신이 하는 행위에 진정성을 다해야만 드러날 수 있다는 것도 그가 보여 준 삶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사유와 만남의 단편들이 모여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거나, 마치 정해진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지금 하는 일에 마음을 두자는 것. 결과와 목표보다는 행위에 그저 충실하자는 것. 글을 쓰게 된 계기와도 맞닿아 있다. 거창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함도 아니고,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글을 쓰면서 과거를 떠올리기도 했고, 새로운 다짐 가운데에 미래에 대한 염원을 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종착역은 ‘지금, 여기의 나’였다.


글을 쓸 땐 그저 글 쓰기에 몰입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회사에 있을 때는 주어진 일을 진실되게 하려는 직장인이었다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그 순간에는 오롯이 수행하는 사람, 그 자체이기를 바란다. 가족들에게는 철이 없다가도, 단단하게 홀로서기 중인 막내딸, 막냇동생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끔씩 속내를 털어놓고픈 도반이기도 할 것이다. 예전만큼은 할 수 없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망나니 때처럼 놀고 마시고 춤추는 사람도 되려고 한다(분기에 딱 한 번 정도는?!ㅎㅎ). 그렇게 고정된 존재로 나를 규정해 두려던 습관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중이다. 이 생에 태어난 이유는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해서보다는 내 앞에 펼쳐진 삶의 과정을 그저 경험하기 위해서일 테니까.


지금도 여전히 목표로 삼은 꿈은 없다. 꿈을 꾸지는 않지만, 대신 흐릿하게나마 삶의 방향은 그려나가고 있다. 스케치하듯 밑그림을 그려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마음 깊숙한 곳이 서원으로 진하게 물들어져 있지 않을까.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가다 보면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더라도 진실로 그 자체가 되어있는, 그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스스로를 대하는 마음이 예전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고 가벼워짐을 느끼는 요즘이다.



Bookmark   나를 살린 문장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므로 과거에 살지 말라.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으므로 미래에도 살지 말라. 완전한 알아차림과 통찰에 의해 바로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공, 고귀한 진리, 만물의 합일과 다름없는 삶을 발견하는 바른 길이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현재에 머물 수 있습니까? 단지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서 들숨과 날숨의 강에 뛰어들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귀한 춤과 박동을 느끼면서 현재에 머물 수 있습니까? 모든 주의와 힘과 마음을 그 박동에 맞추어 실상과 삶 자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관념, 선입견, 생각의 투사에서 벗어난 삶이며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삶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붓다를 만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 아남 툽텐 스님의 <알아차림의 기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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