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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Jun 01. 2023

안개가 피어난 길을 걷고 나면

라니에세이 7 #길

Intro

인생은 저마다의 삶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길은 걸을 때야말로 그 길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종 길을 막아서거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가령 안개와 같은 희뿌연 장벽을 만났을 때다. 안개 속을 걷던 때가 떠오르면서 길을 걷는다는 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태어나고 자란 동네의 멀지 않은 곳에 저수댐이 있다. 저수댐을 에워싼 길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작가가 소개할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봄에는 벚꽃으로, 가을에는 억새풀로, 사계절 내내 아침녘에는 안개와 낮게 깔린 구름이 절경을 이루었다.


학창시절 다니던 학교는 저수댐 하류에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침에는 안개가 피어난 등굣길을 자주 걷곤 했다. 10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한 날도 많았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갯속 길을 걷는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걸을 때 느껴지던 특유의 안개 냄새도 좋아했다. 그곳에 대한 향수인 듯, 아주 가끔씩 산사나 시골에서 안개 냄새를 맡을 때면 그때의 편안함이 찾아드는듯했다.


안개 낀 등굣길은 신비로운 세상으로 들어서는 길목이었다. 똑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설레임으로 시작하는 하루였다. 특히 그런 날은 평소보다 더 날씨가 맑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안개가 걷힌 후 맑게 개인 날씨가 기분으로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안개는 종종 시인들의 이야기 소재로 등장한다. 안개 낀 세상은 벗어나야 할 공간이자, 막막함과 서늘함, 외로움이 뒤엉켜 있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세상을 흐릿하고 뿌옇게 뒤덮어 버리는 성질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안개 속에서 걸을 때의 인상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기억 속, 짙게 안개 낀 등굣길을 다시 걸어 본다. 멀리에서 저 안개 너머를 바라보자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날의 등굣길은 지나가는 사람 없이 늘 혼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걸음을 내딛으면, 눈 앞의 모습이 달라진다.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매일 가던 문방구, 떡볶이집, 신호등도 보이고 등굣길에 늘 인사하던 경찰 아저씨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멀리에 있을 땐 안개 너머가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씩 나아가면서 선명하게 드러난 길을 어느새 걷고 있었다. 안개 낀 세상이 흐렸던 한편 그 길을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안개가 아무리 짙어도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하얗게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내가 가야 할 목적지는 분명했고, 오히려 안개 자욱한 그 길이 목적지로 향하는 시간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학교에 도착해서 가방을 풀어놓을 때 쯤이면, 안개는 사라졌고 쾌청한 하늘이 드러났다.


인생은 저마다의 삶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한다.세상이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있듯, 인생에서도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안개를 맞닥뜨리게 되면 방황하게 된다. 빛 한 줄기 스미지 않는 길에서 우두커니 홀로 서 있다는 쓸쓸함에 외로움이 왈칵 몰려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인생은 안갯속'이라는 시인들의 표현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삶에 짙은 안개가 드리워졌다는 이유로 내가 가야 할 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길목에서의 안개도 결국에는 걷히기 마련이다. 흐린 시야를 탓하며 주저앉아 뭉개버린다면 나아가지 못하고 순환하지 못한다. 체증이 쌓인 듯 꽉 막혀버리고 말 것이다. 늘 빨리 걸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걸음을 멈추고, 숨 한번 고를 수도 있다. 옆 사람의 속도가 아닌 자신만의 속도, 걸음걸이를 다시 찾는 기회로 삼는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지도는 이미 내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고, 길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상을 뿌옇게 만든 안개는 대기가 불안정해지면 사라진다고 한다. 바람이 세게 불어 차가운 하층 공기와 따뜻한 상층 공기가 섞이면서, 해가 떠올라 차가운 하층이 데워지고 하층과 상층의 공기가 섞이면서 안개는 자취를 감춘다. 차차 맑게 개인 하늘을 볼 수 있다. 불안정이 오히려 안정을 되찾아주는 이치다. 다른 날에 비해 안개 낀 날이 더 맑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걸어가던 길이 희뿌옇게 사라진듯 느껴지더라도, 그건 아주 잠깐일 뿐. 우리를 에워싼 불안정한 공기는 곧 맑은 날이 이어질 것이라는 또 다른 신호가 아닐런지.


며칠 전,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저수댐의 근교로 나들이를 다녀왔다고 했다. 전해 받은 사진 속 하늘은 맑았고, 벚꽃길도 참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날 아침, 그 길도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지 않았을까. 안개 냄새를 맡으며, 안갯속  길을 다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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