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에세이 8 #음식
Intro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고, 맛에 예민한 편은 아니다. 줄 서서 기다려가며 먹어야 하는 맛집 탐방에는 별 흥미가 없다. 밖에서 음식을 사 먹기보다는 집에서 만들어 먹기를 더 선호한다. 그러니까 나는, 집밥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이번 주엔 뭘 해 먹을까. 로켓프레쉬 장바구니에 재료들을 담으면서 음식에 담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방울토마토, 양배추, 달걀, 두부, 시금치 그리고 사과나 제철 과일 한 가지씩. 혼자녀의 냉장고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채워두는 재료들이다. 간단하지만 든든하게 한 끼를 먹고 싶은 날엔 양배추&방울토마토 스크램블이 딱 좋은 음식이다. 채 썬 양배추를 올리브오일에 달달 볶은 후 색이 약간 투명해질 때 반토막 낸 방울토마토를 함께 볶기. 방울토마토가 살짝 익었을 때 프라이팬 가운데를 비워두고 달걀을 풀어서 스크램블까지 만들면 양배추&방울토마토 스크램블 완성! 간은 허브솔트로 한다. 덮밥으로 밥에 얹어 먹고 싶을 땐 간장 반스푼 넣어서 감칠맛을 더한다. 방울토마토 덕분에 입맛도 살리고, 양배추가 많이 들어가서 소화에도 부담이 없다.
가끔 브로콜리, 당근, 연근, 알배추, 새송이버섯 등 자투리 채소들이 냉장고 자리를 차지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채소들을 몽땅 썰어서 냄비에 넣고 무수분으로 찜을 한다. 올리브오일과 연두를 넣고 간을 하거나 아니면 오리엔탈 소스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채소 각각이 지닌 자연의 맛을 그대로 느끼면서 아주아주 담백한 한 그릇 요리가 된다. 요리에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고, 채소도 다양하게 먹을 수 있으니 가성비 좋은 건강식이다. 나는 꽤 만족스러운 음식으로 꼽는다.
약속이 있는 날 외식을 하게 되면 무거운 음식을 먹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집에서는 가벼운 음식,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자는 주의이다(사실 이제는 밖에서 사 먹는 음식에 질리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로 점심도 도시락으로 준비하는 게 더 익숙해졌다. 웬만하면 반찬도 직접 만든다. 아주 바쁠 때를 제외하고는 요리하는 시간을 번거롭게 느끼지 않는다.
초록, 노랑, 주황, 빨강. 깨끗하게 손질한 채소의 색감을 보면서 ‘참 예쁘다, 아름답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 색감에 반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흐르는 물에 채소를 세척하는 것에도 뭔가의 의미를 새겨 넣고 싶었다. 그 정도로 요리를 준비하는 시간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채소를 다듬어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냄비에 볶거나 무침을 하거나.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향을 얹으면 웬만한 요리들은 완성이다. 서너 가지 반찬과 국 한 가지를 만들고 나면 대체로 한 시간이 걸린다. 갓 만든 반찬을 통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 냉장고는 일용할 양식으로 다시 채워진다. 덕분에 마음은 든든해진다. 반면, 머릿속을 무겁게 차지하고 있던 생각과 고민은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지게 된다. 손끝의 움직임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재료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맛에 집중하면서 얻게 되는 또 다른 선물이다.
요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건 어렸을 때부터다. 부엌살림을 일찍 했던터라 웬만한 반찬, 찌개, 국은 레시피도 없이 뚝딱 만들 수 있었다. 덕분에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집밥을 차려주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지금은 간단한 음식, 채식 위주로 요리를 하지만 내가 만든 음식 중 친구들이 가장 좋아했던 메뉴는 고등어조림과 찜닭, 소고기뭇국과 참치미역국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그때의 음식들이 생각난다며 종종 얘기를 꺼내고는 한다.
일찍부터 독립한 사람들이 대부분 느끼는 것처럼, 나에게도 집밥에 대한 애틋함, 그리움 같은 게 있었다. 누군가가 차려주는 집밥을 먹는 건 쉽지 않으니, 내가 직접 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끔 지인들을 자취방으로 불러서 음식을 해주는 식이었다. 특히 친한 친구들, 선후배들의 생일 미역국을 챙기는 것을 나름의 신성한 의무(?)로 여겼던 것 같다. 집으로 데리고 와서 미역국에 한 끼 밥상을 차려주거나, 아니면 도시락통에 담아서 선물을 해주거나. 지금 생각하면 약간 오지랖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생일날 미역국은 너무나 중요한 음식이고,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것 또한 너무나 중요한 의식이지 않은가?(^^) 그 당시엔 친구들에게 소박한 한 상을 내어주는 것으로 집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올해는 내 생일에도 미역국을 끓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해 밥을 함께 먹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집밥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조촐한 요리들로 밥상을 채우는 요즘이다. 요리란 누군가를 위한 대접이라기보다는 한 끼 식사, 딱 그 정도의 의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을 위해 요리할 때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요리에 기울이는 정성에 따라서 맛에 차이가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요리하는 마음은 꽤 설레었던 것 같고, 함께 먹는 밥에서는 감칠맛이 더 느꼈던 것 같다. 마주 보고 앉아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오랫동안 모아온 서로의 이야기 재료들을 꺼내놓는 시간이자, 그 재료들을 맛깔나게 재배열하여 각자의 삶으로 다시 가져오는 시간이었다. 단순한 식사 한 끼를 넘어서, 그 맛과 대화와 삶을 음미하는 시간. 따뜻한 집밥을 만드는 설레임이 기다려지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집밥 이선생 솜씨 _ 채소무수분찜, 양배추방울토마토스크램블, 시금치오일파스타, 떡국